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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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영귀서원(詠歸書院)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 391
   김인후(金麟厚) 유팽로(柳彭老) 신이강(辛二剛) 허 소(許 紹) 허 계(許 繼) 위백규(魏伯珪)
   1564년(명종 19년)
   
   陰 3月 18日
   
1564년(명종 19년) 옥과유림들이 옥과 현감으로 재임했던 김인후(金麟厚)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祠宇로 처음 옥과면 죽림리에 영귀정사(詠歸亭祠)로 세워진 뒤, 그로부터 130년 후인 1694년(숙종 20년)에 들어와 영귀서원(詠歸書院)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자료에 따라 배향인(配享人)이 다르게 나오는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주향(主享) 김인후 외에 유팽로(柳彭老), 이흥발, 신이강(辛二剛)을 제향한 것으로 되어있고, 이와달리 『詠歸書院志』에는 이흥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대신, 유팽로, 신이강 외에 허계(許繼)-1797년 추향 -와 허소(許紹), 위백규(魏伯珪) 등 모두 6위의 위패를 봉안(奉安), 제향(祭享)하고 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가 1960년 전라남도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1965년에는 위백규(魏伯珪)를 봉안하여, 6위를 모시게 되었다.

1)주벽 -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 (河西) 또는 담재(澹齋). 전라남도 장성 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해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향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 년도 채 못 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 ․ 공조정랑 ․ 홍문관교리 ․ 성균관직강 등을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해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해,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設)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였다.
즉,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해,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또한 천문 ․ 지리 ․ 의약 ․ 산수 ․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 ․ 변성온(卞成溫) ․ 기효간(奇孝諫) ․ 조희문(趙希文) ․ 오건(吳健) 등이 있다.
그는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篳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 홍문관 ․ 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事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유팽로(柳彭老, 1554~1592)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 ․ 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 개국공신 만수(曼殊)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경안(景顔)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樸) ․ 안영(安瑛) 등과 함께 궐기하여, 피난민 500명과 가복(家僕) 100여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高敬命)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고경명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고경명 휘하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당시에 기호지방에 돌린 격문을 지었는데, 그 격문이《정기록 正氣錄》에 실려 있다.
호남의병들은 처음에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전주를 침입하려 하자 금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전투에 앞서, 적의수만의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분거(分據)하였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패전하였다.
일단 탈출한 그는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그를 일단 구출하고는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이런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光州) 포충사 (褒忠祠)와 금산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3) 신이강(辛二剛, 1601~1661)
자는 유숙(柔叔), 호는 청파(靑破)이다. 본관은 영월(寧越)로 관직(官職)은 봉사(奉事)에 올랐다. 군자감 희직공(希稷公)의 아들로 선조 34년(1601) 생이다. 어릴 적부터 효우(孝友)함에 출천(出天)하고 총명하여 영특하였으며 운학 조평, 우산 안방준 두 선생으로부터 선후천과 시문학 등을 배웠으며 사마시에 등제(登第)하였다. 그러나 병자변란 후에 과거공부를 폐하고,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으며 오직 도(道)를 구(求)하는데 뜻을 두어 용학성리등(庸學性理等)의 제서적(諸書籍)을 송(誦)하는 한편 마음을 성현(聖賢)의 학(學)에 기울여 천인일리도주(天人一理圖註)를 저작(著作)하였다. 당시 옥과 현감인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 이기발(李起浡),허섬(許暹), 정운붕(鄭雲鵬), 허정량(許廷亮), 김홍서(金弘緖), 양산익(梁山益) 等 제공들과 같이 倡義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媾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산림에 은둔하면서 진사 허국빈(許國賓), 유진석(柳震錫) 등과 도의지교로써 교유 하였다. 구도일념하며 용학(庸學)과 성리서적을 정독하였고, 성현학(聖賢學)에 치중하여 천인일리서(天人一理書)를 편저, 선후천론(先後天論) 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4)허소(許紹, 1525~ 1602)
자(子)가 백승(伯承), 호(號)는 설암(雪巖)이며 본관은 태인(泰仁)으로 교리(校理) 사문(斯文)의 후예이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고족제자(高足弟子)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송강(松江) 정철(鄭澈),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등 여러 제현과 더불어 교류하며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품성이 순후하고 온화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도로써 섬기었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동향의 모범이 되었다. 문장의 그릇이 크고, 준수하였으나 과거를 하여 영예를 구하지 않고 오직 도학(道學)과 수신(修身)에 전념하였다.설산(雪山)의 반암(盤巖) 아래 소재(小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옥과 고을에서 모두가 스승으로 섬기었다. 훗날 스스로 樂山樂水 하며 여생을 보내니, 당시 유림들이 처사(處士)라 일컬었다. 세유실기(世有實記)를 저술하였다.
 
5)허계(許繼, 1527~?)
자(子)가 중승(仲承)이고 호(號)는 도봉(道峯)이며 설암(雪巖)의 아우이고 하서(河西)의 문인(門人)이다. 1561년 (명종1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 호암 변성온(卞成溫), 고암 양자징(梁子澂)등 제현과 동문수학 하였으며 고봉, 우계등의 제현과도 交遊講論 하였다.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性理學에 마음을 쏟아 명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아 出仕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河西 先生께서 “大學 한 책에 體와 用이 구비되고, 조리가 정연하니 이를 버리고서는 道에 나아갈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고 학습도 하서선생의 成法을 따라 大學을 중시하고 易經과 中庸등 성리학의 학문연구에만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楚辭를 정독하고 文辭에도 능하였다 한다. 다수의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위백규(魏伯珪, 1727~1798)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 계항(桂巷) ․ 계항거사(桂巷居士). 장흥 출신 할아버지는 세보(世寶)이며, 아버지는 진사 문덕(文德)이다. 처음에 증조부에게 수학했으나 유년기를 지난 뒤에는 자수면업(自修勉業)하였다. 어려서부터 제가서(諸家書)를 탐독해 학문적 자세를 굳힌 그는 향리의 장천재(長川齋 : 장흥의 관산면 방촌리)에 기거하면서 면학과 교화의 일익을 담당했고, 1750년(영조 26) 학행으로 향천(鄕薦)을 받기도 하였다. 1751년 스승 윤봉구(尹鳳九)를 만나 그 뒤1766년까지 경서 ․ 의례 ․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한 논의를 통해 학문적 계도를 받았다.
과거에 계속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그 뒤 1794년(정도 18) 68세 때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 기장(機長) ․ 태인 ․ 옥과현감,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을 차례로 지냈다. 학통은 이이(李珥) ․ 김장생(金長生) ․ 송시열(宋時烈) ․ 권상하(權尙夏) ․ 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른계이나,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체가 짙다. 경전의 이해나 심성론 ․ 이기론에서는 전통 성리학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정현신보 政絃新譜》나 봉사류(奉事類)에서 당시의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어 실학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촌사회 개선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지방 교육 개선을 통해 향촌 질서의 유지와 교화뿐만 아니라 관리 선발, 지방관리 의 경제 기능까지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정치 기강의 해이와 이에 따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관제 축소, 향촌의 자율적 공평 부세론, 지방 관리 선도책 등을 구상하고, 셋째 견실한 향촌 방위 체제를 주장한 점이다.
이 향촌사회 개선론을 일관하는 기본 구상은 향촌의 자율성 모색과 공의의 구현으로 집약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율성과 공의 창달의 주도자나 중간 계층으로서, 사회의 견제 및 비판과 민중 옹호라는 양면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세론 외에도 경학 ․ 지리 ․ 의학 등에 관한 저술이 문집《존재집 存齋集》 22권 안에 망라되어 있어 학문 폭이 매우 넓고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 대한 후인의 인물평이나 저술과는 달리 교유 관계나 후학은 매우 소략하고 묘연해 밝히기가 힘들다. 이것은 그가 호남의 벽지에서 무명의 선비로 거의 전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1805년(순조 5) 향리 유생들의 발의로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존재집》․ 《정현신보》․《사서차의 四書箚義》 ․ 《환영지 寰瀛誌》․ 《본초강목 本草綱目》․《고금 古琴》․ 《격물설 格物設》․《원류 原類》․《연어 然語》등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3칸의 강당, 1칸의 전사청(典祀廳), 외삼문(外三門), 고사(雇舍)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인후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허소 ․ 유팽로 ․ 위백규 ․ 허계 ․ 신이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필암서원지 筆巖書院誌》3책을 비롯하여 300여 권의 문헌이 있다.
참고- 곡성군 홈페이지 http://www.simcheong.com
곡성문화원 http://gs-culture.or.kr (곡성문화재)
소구리 문화지도 http://soguri.com/jeollanam-do/ (한국의 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