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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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방산서원(方山書院)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이촌마을
   윤효손(尹孝孫) 윤 위(尹 威) 이경석(李景奭)
   1702년(숙종 29)
   
   3월 16일(음력)
   윤문효공신도비(尹文孝公神道碑) -보물 제584호(1975.03.31지정)
1702년(숙종 28) 전라도 사림들의 공의로 조선 성종조 명신 문효공 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을 배향하기 위하여 남원부 중방리(현재 구례군 용방면)에 창건. 1716년(숙종42) 좌윤 증이조판서 성만(星灣) 최연(崔葕)과 대제학 영의정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을 추배. 1740년(영조16) 고려조 국자사업 남원백 벽송(碧松) 윤위(尹威)를 추배하고 주벽으로 삼음. 1760년(영조36) 정언 삼계(三溪) 최언수(崔彦粹)를 추배.
서원 창립후 선현의 덕을 기리고 후진을 교육하며 세도(世道)를 바르게 하고 백성의 풍속을 교화하는 역할을 함. 1868년(무진·고종5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됨. 1985년 지방 유림들의 발의로 구례군 이평리 추계 윤효손의 묘정 앞에 서원을 중건하여 윤효손 단독 위패를 모신 향사를 복원함. 1994년 벽송 윤위와 백헌 이경석의 향사를 복원하고 삼위를 매년 음력 3월 16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최연과 최언수 두선생의 위패는 복설 후에는 봉안하지 않고 있다.

1) 주벽-윤위(尹威)
공은 고려 신종(神宗)조의 문신으로 호는 벽송(碧松)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 고려삼한통합공신 태사공(太師公) 신달(莘達)의 8세손이고 문하시중 문숙공(文肅公) 관(瓘)의 증손이며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덕첨(德瞻)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남원백(南原伯)의 봉군을 받아 남원윤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명종 6년(1176)에 등과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 공이 말하기를 공은 인품이 인후온자(仁厚溫藉)하고 방정염약(方正廉約)하며 덕행과 문장을 모두 갖추었고 몸가짐과 행동에 있어서는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한 절목은 생략하고 대체를 중히 여기므로 장차 재상될 인물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크게 기대하였다고 한다. 박사(博士)가 되어 상장(上將) 최세보(崔世輔)와 함께 국사를 지었고 기거랑(起居郞) 이부낭중(吏部郎中) 예빈소경(禮賓少卿)을 거쳐 지제고(知制誥)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하므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광종(光宗)황제가 특별히 비단옷과 서대(犀帶)를 하사하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주자(朱子)의 문인이며 대학자인 섭적(葉適)이 공의 접빙관이 되어 서로 시(詩)를 읊고 친교하는 뜻 깊은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공은 태학(太學)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임금께 경세(經世)의 도리(道理)를 강론하는 국자사업(國子司業)의 벼슬에 있다가 신종(神宗) 3년(1200)에 호남염찰사(湖南廉察使)가 되었다. 때마침 도내 남원부(南原府)에서 도적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기세가 매우 거세고 흉악하므로 백성들이 불안하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은 임금의 명을 받아 그 난리를 안무하기 위하여 단기(單騎)로 도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부중(府中)에 들어가 난동으로 초래되는 화(禍)를 설명하고 설득하였다. 이에 그들이 모두 감읍하고 뉘우치며 해산하니 민생(民生)이 평안하게 되었다. 막강한 군사를 지휘하는 안무사(按撫使)가 창칼을 든 완악한 도적들의 난리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설유(說諭)하여 질서를 회복한 일은 고금의 역사에 드문 일이다. 후세에 정다산(丁茶山)은 윤공(尹公)의 남원부안무(南原府按撫)야 말로 한(漢)나라 장강(張綱)이 광능태수때에 하였던 바와 비견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신종임금은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을 남원백(南原伯)으로 봉하고 그곳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이로써 공은 파평(坡平)에서 분관하여 남원윤씨(南原尹氏)의 시조가 되었다. 희종(熙宗) 초에 공은 억울한 모함을 받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전임되었다. 그때 태학생 수백명이 대궐 앞에 몰려가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만류하였으나 서도(西都)로 부임한 공은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공의 상을 듣고 임금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애도하였으며 남원(南原) 백성들은 공의 유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재물을 모으고 흙을 쌓아 큰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상서성우복야(尙書省右僕射)로 증직되고 1740년(영조16)에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2) 윤효손(尹孝孫1431~1503)
자는 유경(有慶), 호는 추계(楸溪)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고려의 국자사업(國子司業) 남원백(南原伯) 윤위(尹威)의 8세손이며 순창군수 증이조판서 처관(處寬)의 아들이다. 1431(세종13) 남원부 중방리(현재의 구례군 용방면 소재)에서 태어났다. 1450년(세종32) 생원이 되고 1453년(단종원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출사하여1455(세조1) 집현전(集賢殿) 저작(著作)과 박사(博士)를 제수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년 전농주부(典農注簿)에 오르고 문과중시(文科重試)에 합격하여 우헌납(右獻納)에 특임되었다. 이어 예조정랑(禮曺正郞), 성균사예(成均司藝),의정부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아가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다. 1468년(세조14)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에 제수되고 1470년(성종원년)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에 올라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전사고(典祠庫)의 설치를 주동하였다. 이어 호조(戶曹)참의를 거쳐 1474년 예조(禮曹)참의로 옮겨 「국조오례의」의 편찬을 완성하고 어머니 봉양을 간청하여 특별히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제수받았으며, 재임 중 고원등제(庫員等第)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이 건의는 전지(田地)의 등급을 정하여 조세를 부과하자는 혁신적인 주장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조정에 큰 공론을 일으켰다. 이때 공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고 치적이 탁월하므로 백성들이 임금께 포상을 청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특별히 당표리(唐表裏) 한벌을 하사하고 높이 치하하였다. 공조와 형조의 참판을 거쳐 1477년(성종8)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를 제수하고 재임중 청도군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공과 의논하여 주례(周禮)를 간행하였다. 한성부 좌우윤(漢城府 左右尹)을 거쳐 1478년(성종9)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모친 봉양을 위해 귀향하여 방산(方山)에 삼성당(三省堂)을 짓고 원근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때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공이 화개에서 공을 찾아와 성리학을 토론한 바 있다. 1486(성종17)에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3년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및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였다. 이어서 1490년(성종21)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가서 「활민대략」(活民大略)·「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등의 서적과 조맹부의 족자 1첩을 가져와 임금께 진상하고 문묘(文廟)에 모신 선성(先聖)·선사(先師)의 제향에 중국처럼 찬탁(饌卓)의 예를 갖추고 세자의 원유관(遠遊冠)과 장복제도(章服制度)를 새롭게 고칠 것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다. 또한 선비의 의표인 유건(儒巾)을 창제하고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께 주례와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시행하여 향촌의 의례를 확립하고 풍속을 교화하도록 하였다. 1491년(성종22)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가 치적을 크게 올려 왕의 찬사를 받았고 경상도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 한성부의 좌·우윤(左·右尹)을 거쳐 1493년(성종24)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이어서 의정부 우참찬(右叅贊)으로 특진관(特進官)을 겸하고 성종 임금이 돌아가심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고 「성종실록 成宗實錄」 편찬 당상사관이 되었다. 이때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에 파직되었다. 이듬해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명되고 다시 우참찬이 되었으며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03년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참찬(左叅贊)에 이르러 향년 73세로 졸하였다. 공은 성리의 학문과 예학에 밝아 선비들이 큰 학자로 추중하였다. 어려서부터 효경(孝經)을 거울삼아 부모를 극진히 섬기므로 할아버지가 가상히 여겨 효손(孝孫)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사람들은 공을 효경동자라고 칭송하였다. 부친이 정해년(丁亥)에 나신 분이므로 평생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열두살 때에 부친을 위하는 효심에서 영의정 박원형(朴元亨) 공에게 충언(忠言)을 담아 바친 시(詩)가 인연이 되어 정승의 사위가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양친이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 벼슬을 구하여 나아가기도 하였다.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니 경직자혜(敬直慈惠)를 문(文)이라 하고 능양능공(能養能恭)을 효(孝)라 이른다는 뜻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흥문관과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고 1702(임오·숙종28)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3)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혹은 쌍계(雙溪)이고 본관은 전주이니 정종(定宗)대왕의 열째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6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증영의정 유간(惟侃)의 아들이다. 1595년(선조28)에 태어났으며 형인 효민공(孝敏公)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에게 글을 배웠다.
1613년(광해군 5)에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원년)에 알성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검열과 봉교를 지냈으며 이어서 주서(注書)를 역임하고 헌납과 부교리를 거쳐 이조의 낭관(郎官)으로 옮겼으며 1626년에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수찬, 직강, 양주목사, 우승지를 지내고 1636년(병자년)에 부제학과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해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임금이 굴욕을 당하였으며 공은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찬진하였다. 이 비문은 청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으로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임금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처음에 대제학 장유(張維)와 예조참판 조희일(趙希逸)에게 명하여 글을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쓴 글에 대하여 청인들이 매우 불만을 드러내고 급하게 독촉하므로 임금께서 공에게 명하여 글을 찬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천(句踐)은 신첩(臣妾)노릇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강하기를 도모하였다.오늘날은 어쩔 수 없이 청인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 행여 저들을 격노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공은 억지로 임금의 명을 따랐으나 백형 석문공(石門公)에게 글을 보내기를 "문자 배운 것이 후회됩니다"(悔學文字)라고 하였다. 1638년 대제학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1642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신으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가 1년간 봉황성(鳳皇城)에 구금되었다. 1643년 참찬에 임명되고 이어서 이조판서에 보직되었다. 이때에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여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특히 산림의 학자들을 기용하는데 힘써 우암 송시열(宋時烈) ․ 동춘 송준길(宋浚吉) 등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오도록 하였다. 1645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47년 좌의정을 제수하고 1649년 영의정에 진배(進拜)하였다. 1650년에 효종임금의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져 그 일을 추궁하려고 청나라 사신이 와서 우리의 조정 대신들을 꾸짖고 문득 책임을 임금에게 돌리니 영상인 공이 "우리 임금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며 모든 허물과 책임은 수상(首相)인 나에게 있다"고 하였다. 화(禍)가 자신에게 닥칠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하니 사신이 "동국(東國)의 인재는 오직 이상국(李相國) 한사람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말하기를 이상공은 책임을 지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공을 위하여 힘껏 해명하므로 우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공을 감금하였다. 이때 임금은 공에게 수찰(手札)을 내려" 서로 만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자애하라"고 하였다. 1651년(효종2)에 석방되었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다시 등용되지 못하다가 뒤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수 총재에 임명되었다. 1671년에 졸하니 향년 71세이다.
공은 나라의 정사를 맡은 수상(首相)이었고 문형(文衡)을 맡은 대신이었으며 국운이 위태로울 때의 충신이었다. 평생 소학(小學)과 논어(論語)를 거울삼아 자신을 수양하였으며 노년에도 근사록(近思錄)과 주서(朱書)를 외우고 한유와 두보의 시를 좋아하였다. 글씨가 경쾌하고 아름다웠으며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1716년(숙종 42)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하였다.

사당인 모덕사(慕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와가이며 내삼문 및 외삼문 ․ 경앙문(景仰門)과 일직선 상에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사당 우측에 있는 추모재(追慕齋)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와가이며 좌측에 있는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와가이다.
윤문효공신도비(尹文孝公神道碑) - 국가 문화재 보물 제584호
이 비는 1519년(중종 14)에 세운 문효공 추계 윤효손(尹孝孫)의 신도비인데 1975년 3월 31일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의 방산서원 뒤쪽에 있는 윤효손 묘정에 소재하며 조선시대 석비 가운데 형식이 매우 특이하고 조각이 수승(殊勝)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전 적
1) 「방산서원지」(方山書院誌)
2) 「추계선생실기」(楸溪先生實記)
3) 「백헌집」(白軒集)
4)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6) 「국조인물고」(國朝人物攷)
참고-구례군지편찬위원회, ≪구례군지≫,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구례군 문화관광
사진-광주.전남 문화관광포털 남도코리아
http://www.namdokorea.com/culture/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