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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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경현서원(景賢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 황(李 滉) 기대승(奇大升) 김성일(金誠一)
   1584년(선조 17)
   1609년(광해군 1)
   (음력)2월 15일
   
경현서원은 나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선유학의 정통을 대변하는 많은 인물들을 배향하였던 곳이다. 1583년(선조 16) 나주를 중심으로 한 도내 유림들이 상소를 올림에 따라 김굉필(金宏弼)을 모실 서원 건립이 허락되었다. 그 때 나주목사로 있던 김성일(金誠一)이 적극 지원하여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에 완공되었다.
당시 서원 터는 나주의 서문 밖 대곡동이었고, 서원 명칭은 <금양錦陽>이었다. 이 때 서원의 규모는 매우 정연하고 컸다. 회극당(會極堂, 강당), 영인당(永仁堂, 동랑) 정의당(精義堂, 서랑), 시습재(時習齋, 서재), 일신재(日新齋, 동재), 지원문(知遠門) 그리고 담장 밖에 10여 칸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원의 경재기반도 튼튼하여 반월도(현재 안좌면) 등 3개 도서의 포작선과 500여석의 식리재 그리고 7인의 수호유생이 있었다. 원규는 김성일이 직접 백록동규를 본받아 작성하였다. 김성일에 이어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임윤신(任允臣) 목사 때 이 지방 유생인 나시침의 아들인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 등이 발의하여 1589년(선조 22)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4위를 배향하여 오현사(五賢祠)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서원원장으로 김천일(金千鎰), 정개청(鄭介淸),안방준(安邦俊) 등 호남의 이름난 선비들이 임석하여 사풍(士風)과 학성(學聲)이 인근에서 추숭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경현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이를 애석하게 여긴 사림들이 중건을 모색하던 가운데 나주목사로 부임한 목장흠(睦長欽)이 전라도 관찰사 박승종의 후원과 뜻있는 사림과 합력하여 1608년(광해군 원년) 중건하였다. 1609년에는 호남유생 김선(金璇)등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경현>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다.
그 후 1693년(숙종 19)에는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을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이후1868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기에 이른다.(실제훼철은 1871년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의 서원건물은 1977년 영안마을에 이전 복원된 것이다. 당시 김희철, 정동채, 유제수 등이 크게 주력하였다.

1)주벽-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중곤(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소형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 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박한공(朴漢恭)·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지의(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一두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3)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호는 정암(靜庵)이다. 17세때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은

현재 경현서원은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함께 아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인 사당과, 정면4칸에 팔작집인 강당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1칸씩의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경현서원에 관련된 자료는 최근의 것이긴 하나 ≪경현서원지≫1책(1983년)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밖에 1980년에 세워진 <경현서원묘정비>와 <경현서원강당신축연의비>가 있다.

참고-나주시지1,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나주신문사 http://najunews.co.kr/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