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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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월정서원(月井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1구 광곡마을
   박 순(朴 淳) 김계휘(金繼輝) 심의겸(沈義謙) 정 철(鄭 澈) 홍천경(洪千璟)
   1659년(효종 10)
   1669년(현종 10)
   음력 3월 6일
   
월정서원은 원래 금성산 월정봉 아래에 있었으나,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유허비를 세우고 설단향사(設壇享祀)하다가 1974년 현재 위치로 복설하였다. 이 서원은 1659년(효종 10) 사암 박순(思庵 朴淳)의 학덕을 흠모하는 도내사림들의 발론(發論)으로 홍탁이 서원창건을 청하는 상소(≪사암집≫<월정서원사제문> 1659년, 홍탁 찬)을 올려 허락을 받은 뒤 임위 ‧ 나준 ‧ 홍적 등이 주축이 되어 창건을 보게 되었다.
그 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이 내려졌으며, 이때에 치제관(致祭官)으로 예조정랑 강복원(姜復元이) 파견되었다. (≪사암집≫중<월정서원사제문>) 현재 월정서원에는 역대원장의 명단이 남아있다. 초대원장은 민유중(閔維重), 원이(院貳)는 남구만(南九萬)이었고, 이밖에 송시열, 이민숙, 유탁기, 이재, 김원행 등의 서인노론계 인사들이 기록되어 있다.<월정서원사제문>
한편 1787년(정조 11)에는 심환지, 심이지, 민종현, 이서구 등이 주력하여 서원 중수가 이루어졌다. 1789년(정조 13)에는 사암과 함께 동덕사현(同德四賢)으로서 김계휘, 심의겸, 정철, 홍천경을 추배하려는 이 지역 유생 38인과 태학유생의 상소로 5위가 제향 되었다. 처음 5위 제향 때에는 나주목사 이전모와 최익동, 나학신이 제관으로 참여하였다. 1796년(정조 20) 강당이 중수되었고, 1802년(순조 2)에 동서재(東西齋)와 삼문을 중수하였다. 당시 원장은 한용구(韓用龜)였고, 강당이름은 월원당(月院堂), 동재는 은구재(隱求齋), 정문은 진덕문(進德門)이라 편액하였다.
그 후 1832년(순조 32) 홍석주 원장 때 2차 중수가 있었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어 옛 터에 단을 쌓고 제사지내오다 국도 1호선 확포장으로 인해 지금 장소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제향과 이건 복설사업은 홍천경(洪千璟)의 후손들인 풍산홍씨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1913년에는 유허비를 홍승경(洪承慶)이 건립하였고, 1974년 현재의 위치에 터를 잡고 사우와 강당 등 건물을 옮겨 중건하였다.

1)주벽-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우(祐)이며, 어머니는 당악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 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김계휘(金繼輝, 1526∼158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 아버지는 지례현감(知禮縣監) 호(鎬)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공조정랑(工曹正郎) 광원(光元)의 딸이다. 장생(長生)은 그의 아들이다.
일찍이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1549년 (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해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다. 그 뒤에도 벼슬은 올랐지만 오랫동안 사가독서를 하였다.
1557년 김홍도(金弘度)와 김여부(金汝孚)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562년 다시 전의 관직인 이조정랑으로 복직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중이어서 나가지 않았다. 3년 상을 마치고 다시 벼슬길에 올라 첨정·사간(司諫)·집의(執義)·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 등을 역임했고, 1566년 문과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571년(선조4) 이조참의·예조참의에 제수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황해도·전라도의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형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575년 동서 분당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된 적도 있으나, 당파에는 별로 깊이 간여하지 않고 오히려 당쟁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어서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천·마을·도로·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 현황, 각 지방의 전통·연혁·씨족 원류 등을 두루 파악해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 되었다.
 
 
3)심의겸(沈義謙,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사인(舍人) 순문(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고,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증판서 대(蹶)의 딸이다.
족부인 감찰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임명되었다. 1563년 사림들이 이량(李樑)으로부터 화를 입게 되자 외숙인 양을 탄핵하며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는 등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힘썼으나 도리어 왕의 외척으로 일을 꾸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64년 지평(持平)·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이듬해 사간·부응교(副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566년 집의(執義)·군기시정(軍器寺正)·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9년 (선조 2) 좌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572년 이조참의 등을 지내는 동안 척신 출신으로서 사림들 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신진세력인 김효원(金孝元)이 김계휘(金繼輝)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었는데,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발탁되었는데, 이번에는 1575년 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전랑(銓郎)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西人), 신진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東人)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즉,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산다 하여 그 무리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당시 정승 노수신(盧守愼)과 이이(李珥)가 사림간의 분규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올린 소에 의해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전라감사를 거쳐,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 뒤 한때 낙향하여 은퇴했으나, 1580년 예조참판으로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이 때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그를 질투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 동인과 합세하여 공박함으로써 파직 당하였다. 그러나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 되었다.
 
4)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으로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와 강항(姜項)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 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 短歌雜篇> 32수, <성은가 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5)홍천경(洪千璟, 1553∼16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 아버지는 응복(應福)이다.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배워 유학에 조예가 깊고, 충의의 정신이 강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으로 나가 군량의 수집, 수송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문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나주교수·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 되었다.

현재 월정서원은 약간 경사진 지형에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존 건물로는 사당과 1976년에 건립된 강당 그리고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현재 5위의 위패를 안치하고 있는 사당은 전면에 마루를 둔 정면 4칸의 단층 건물이며, 내·외삼문은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외삼문의 중앙 1칸은 통로로 이용하고, 양측 1칸은 광으로 꾸몄다.
관련유적으로는 경내에 <월정서원유허비>(옛터에서 1976년 이건)와 <월정서원묘정비>(홍석희 지음, 홍광식 씀)가 있고, 금안리 마을 입구에는 <盤恒홍선생유허비(홍혁주 지음, 1957년)가 있다. 서원관련문적으로는 훼철 이후의 ≪단향참제록≫≪제관록≫≪임원록≫<모현계안> 등 문서가 있고, 옛 문서로는 역대원장, 원이(院貳), 진신유사, 유사 등의 명단이 기록된 좌목(座目, 월정서원부표안)만이 남아있다.

참고-나주시지1,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광주·전남 문화관광포털
http://www.namdokorea.com/culture/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