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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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대계서원(大溪書院)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안방준(安邦俊)
   1657년(효종 8)
   1698년(숙종 24)
   불향
   
대계서원은 1657년(효종 8) 안방준(安邦俊)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보성유림들의 발의로 건립된 서원이다. 최초설립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보성읍 우산리 대계(보성여중) 앞이였는데, 이는 안방준이 죽은 직후 능주의 도산사 창건(1656) 및 동복의 도원서원 배향(1657)과 함께 추진된 것이다. 그러나 1677년 양몽거의 정철 탄핵에 이어 1869년에 유경서, 유후상, 이우보 등의 상소가 있자, 1691년 호남인 정무서 등도 같은 논의로 정철에 대한 추탈문제와 아울러 안방준 사우의 훼철을 주장하였다. 이에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이현일이 역청(力請)하여 모두 허락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안방준 사우의 훼철사실에 관하여는≪서원등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훼철령이 있은 직후인 1692년 봄 전라감사 홍만조는 이때 동북 도원서원의 안방준 위판철향, 능주도산사 훼철, 보성 대계서원 훼철의 완료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 뒤 1694년(숙종 20)에 성균유생들이 상소하여 서원의 복구를 주청하여 이듬해에 대계서원은 복설되었으며 이때 호남유생 이기억 등은 청액상소를 올렸다. 이후 대계서원의 청액소는 1698년(숙종 24) 오명희에 의해 다시 올려 졌는데 이 상소문에서 오명희 등은 우산 안방준의 학덕과 충의를 들어 반드시 은액(恩額)이 내려져야 함을 파견하여 선액(宣額)되었다. 1704년(숙종 30) 사액을 받은 후의 대계서원사적은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으며 다만 1773년(영조 49)≪우산문집≫5책이 이 서원에서 편집 간행되었던 사실과, 1787년(정조 11)의 이건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1787년의 이건은 홍수로 인해 서원이 크게 파손됨에 따라 관내 유림들의 협조로 장원봉 기슭의 현 유지터로 옮겨지었던 것이라 전해진다. 이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어 복설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들어와 복설 중이다.

1)주벽-안방준(安邦俊, 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빙호(氷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이며, 처는 경주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 호남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 초 지방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벼슬에 등용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선비)을 초치 등용하려 했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 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대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 : 기를 숭상함)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으로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우산사(牛山祠)가 남아았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사우이다. 1848년 상량하였고 우산관계문적이 일부 보존되어 있다. 최근 복설공사가 진행 중이며 사우 외에 강당과 동·서재, 내·외삼문에 담장이 둘러졌으며, 홍살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隱峯全書≫: 우산 안방준의 저술은 1773년(영조 49) 대계서원에서 목판본으로 5책을 간행한 이후, 1864년 6대손 수록(壽祿)의 주동으로 20책(본집 38권, 부록2권)이 성편(成編)되었다. 그 후 1969년 전국유림과 후손들이 합력하여 유묵과 자료를 보완하여 속집 2권 1책과 새롭게 보록 4권 2책을 간행, 모두 44권 21책이 되었다. 이 1969년 本은 ≪隱峯全書≫로 영인출간(1973년, 한국사상연구소刊) 되었다.
 
대계서원 관련 문서는 대계서원진신장의안(大溪書院搢紳掌議案) 등 조선후기의 기록자료로서 사액서원의 운영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과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크다. 가치가 있다.
고문서 가운데 교지류는 안방준(安邦俊) - 안후지(安厚之) - 안전(安全) - 안두상(安斗相) 등 4대에 걸친 차첩, 교첩, 유지, 교지 등으로 당시 제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명문류는 1600년대 후반에서 등 1800년대 후반에 이르는 문서로서 매매관행과 제도를 알 있는 고문서이다. 소지류는 『은봉전서』간행과 관련하여 문파(門派)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문서와 산송(山訟)이나 계(契), 위선(爲先) 사업과 관련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조선조 후기에 한 종가의 역사와 생활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보성의 은봉 안방준 종가와 대계서원에 소장된 고문서는 선현의 간찰, 대계서원 문서, 안방준과 그 후손관 관련되는 교지류와 호적문서, 그리고 명문류와 소지류 등이다. 이들 문서는 조선조의 정치상황, 선비들의 출처관(出處觀), 친인척 간의 교유, 인물교류사, 사액서원의 운영, 종가를 중심으로 한 생활사 등 조선후기 제도사와 향촌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도 있다. 또한 간독류는 예술적 가치도 있다.
참고-목포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

관리자 12-11-14 13:30
 
은봉 안방준 대계서원 144년만에 다시 세워져
144년만에 다시 세워진 대계서원

(보성=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저술가인 은봉(隱峰) 안방준(1573~1654) 선생을 모신 대계서원이 144년 만에 다시 세워졌다. 사단법인 은봉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안 준)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옛 대계서원 자리에 서원을 복설(復設)해 10일 준공식을 했다"고 11일 밝혔다. 2012.11.11 << 지방기사 참조.은봉선생 기념사업회 >> sangwon700@yna.co.kr

(보성=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저술가인 은봉(隱峰) 안방준(1573~1654) 선생을 모신 대계서원이 144년 만에 다시 세워졌다. 사단법인 은봉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안 준)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옛 대계서원 자리에 서원을 복설(復設)해 10일 준공식을 했다"고 11일 밝혔다.
이 일대 8천200여㎡에 23억 원을 들여 건립된 서운에는 조문사, 숭도문, 서원, 격치재, 은봉유물 전시관 등 13동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문화재 등록업체가 참여했으며 현판은 동춘 송준길, 녹양 박경래, 학정 이돈흥 등이 필치로 제작됐다.
사업회 측은 청소년 인성·충효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농한기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진행할 계획이다.
안 준 이사장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인성교육의 장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절의를 숭상하는 그의 정신을 되살린 전통문화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은봉은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나 박광전·성혼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사를 정리해 진주서사·삼원기사·호남의록 등을 남겼으며 기묘유적·항의신편 등을 집필해 쇠퇴하는 사림 정신을 고취하는데도 주력했다.
그러나 저서 대부분은 소실됐으며 남은 저서와 진신장의안·유안·심원록 등 132점은 전남유형문화재 303호로 지정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들은 대계서원을 건립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

sangwon70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