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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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천서원(松川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동송리 409-1번지
   김일손(金馹孫) 김대인(金大仁) 김치모(金致慕)
   1954년 현위치에 건립
   
   3월, 9월 중정(中丁)
   
원래는 승주군 주암면 백록리 광천정에 있었는데, 1954년에 지금의 서원을 복원하여 송천서원이라 하였다. 송천서원은 당시 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모두 받아들여 공부하던 공간이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보존만 하는 상태이다. 자연석으로 바른층쌓기한 기단은 1999년 6월에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자연스럽지 못하다. 서원에는 김일손(金馹孫), 김대인(金大仁), 김치모(金致慕) 3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할아버지는 극일(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 : 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2)김대인(金大仁,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순천 출신. 천민 출신으로 어려서 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중년에 환속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에게 기개를 인정받아 그 막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의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이순신의 후임으로 온 원균(元均)의 휘하에 있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 수군이 연패할 때 물에 빠져 사흘을 헤매다가 탈출하였다. 그 뒤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연해안 곳곳에서 적과 싸우다가 광양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다시 출진하여 예성산(禮星山)에 웅거하면서 부근일대를 수호하며 많은 적을 베고 전공을 세웠다. 1600년 그 공으로 당상관에 올라 임치진첨절제사(臨淄鎭僉節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뜻에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그 뒤 전라좌수사 이유직(李惟直)의 비행을 면박하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
 
3)김치모(金致慕, 1573~?)
호는 이모재(二慕齋), 본관은 김해(金海), 한성판윤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종들과 촌민 등 의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많은 적을 무찔렀다. 남해의 싸움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많은 공로를 세웠다. 왜적을 친 공로로 녹훈을 내렸으며 병판(兵判)을 추증하고 시호를 익충(翼忠)이라 했다.

이 서원의 건물인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전후 툇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량 구조로 건물 전체를 사각기둥이 지탱하고 있다.우물마루의 바닥은 장판으로 깔아 방으로 개조하였으며, 홍예보 위체 판대공을 얹고 종도리를 받친다. 종도리 밑 부분에 상량문이 적혀져 있다. 공부하는 공간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 전후에 이분합 띠살문을 설치하였으나 지금은 뒷문을 폐쇄하였다. 사당으로는 송천사가 있다.

참고-순천시, <<순천 문화재 이야기>>, 2007.
순천의 문화유산 http://heritage.sc.go.kr/
순천문화원 http://www.sccc.or.kr/cultur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순천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