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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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천서원(玉川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 165
   김굉필(金宏弼)
   1564년(명종 19)
   1568년(선조 1)
   3월, 9월 중정(中丁)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호(1984.02.29지정)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옥천서원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일파로 연루된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되어 죽자, 그 학덕을 기려 1564년(명종 19) 순천부사 이정(李禎)이 처음 창건하여 ‘경현당’이라 하였다.
1565년(명종 20) 김굉필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지으면서 ‘옥천정사(玉川精舍)’라 하였는데, 1568년(선조 1) 순천부사 김계(金啓)의 상소에 의하여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뒤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1604년, 1653년, 1717년에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0)에 묘정비를 세웠다.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헐렸다가 1928년 유림들이 복설하였다.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

1)주벽-김굉필(金宏弼, 1454~1504)
김굉필은 자가 대유, 호는 한훤당 또는 사옹, 본관은 서흥(瑞興)으로 사용 유(紐)의 아들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0년(성종 11)사마시에 합격하여 척불의 소를 올린 바 있으며, 1494년 유일로 천거받아 참봉의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1497년에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루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가까운 곳으로 옮겨달라는 상소를 올려1500년 순천에 이배되었다. 순천에 이배되어 와서는 그보다 먼저 유배와 있었던 조위와 어울려 임청대 등을 찾아다니며 시주(詩酒)로 소요하며 지냈다. 그 후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51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경전의 연구 등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으며 실천궁행의 정신으로 행동하여 조선시대 5현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문하생으로는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 등이 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해군 때 전국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국 여러 곳의 서원에 제향 되었는데 옥천서원을 비롯하여 아산의 인산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희천의 상현서원 등이다. 저서로는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경현당(景賢堂), 4칸의 지도재(志道齋), 4칸의 의인재(依仁齋), 1칸의 전사청(典祀廳),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직사(雇直舍) 등이 있다.
건물배치는 경현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집의당, 내삼문, 그리고 사우인 옥천사가 있다. 안에는 ‘옥천서원묘정비’가 있다. 사당은 정면3칸, 측면 1칸 반으로 전면을 툇문으로 개방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구는 4량 가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맞배지붕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앙은 대청을 깔고, 양측 협문에는 온돌을 놓았으며 후면에만 짧게 마루를 달았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맞배지붕이다.

1)서책은 선조가 내린 사서(四書)를 비롯하여 200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
2)옥천서원묘정비
1760년(영조 30)에 묘정비를 세웠으며, 이 때 비문은 김원행이 지었고 글씨는 홍봉조(洪鳳祚)가 썼다. 전서글씨는 당시 옥천서원 원장이던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참고-순천시사
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