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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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봉암서원(鳳岩書院)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19
   변이중(邊以中) 변경윤(邊慶胤) 윤 진(尹 軫) 변 휴(邊 烋) 변윤중(邊允中) 변덕윤(邊德胤) 변치명(邊致明)
   1697년(숙종 23)
   
   2월 20일, 8월 20일
   전라남도기념물 제54호(1981.10.20지정)
조선시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화차를 발명하여 전공을 세웠던 변이중(邊以中)을 배향한 서원, 1697년(숙종 23) 장성군 내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변이중의 출생지이자 강학 장소인 현재의 장성 장안리에 처음 건립하였다.
1707년 큰아들인 자하 변경윤(紫霞 邊慶胤), 1728년에는 정유재란 때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尹軫), 1765년에는 변이중의 현손인 청류당 변휴(聽流堂 邊烋)를 각각 추배하였다. 1868년 서원철페령으로 헐렸다가 그 뒤 1976년 장성군 유림의 성원과 호순의 노력에 의하여 복설되고, 1984년에는 휴암 변윤증을 추배하고, 1989년에는 명산 변덕윤(明山 邊德胤), 1994년에는 묵포옹 변치명(墨逋翁 邊致明)을 추배하였다.

1)주벽-변이중(邊以中, 1546∼16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황주(黃州).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택(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咸淵李氏)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군비(軍備) 수습에 힘썼다. 그 뒤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되어 누차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1600년(선조 33) 사옹원정,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그가 쓴 <총통화전도설 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 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이었다.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묘갈명 등에서 그의 학문과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저서에 ≪망암집≫이 있다.
 
2)변경윤(邊慶胤, 1574∼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황주(黃州). 자는 자여(子餘), 호는 자하(紫霞). 처정(處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택(澤)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이중(以中)이며, 어머니는 오인준(吳仁俊)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으로서 편당(偏黨)에 따른 기강과 형정(刑政)의 문란, 사습(士習)·공도(公道)의 어지러움, 국가재정·민생의 파탄 등 시폐를 논하고 이의 시정을 상소하였다. 또 이산해(李山海)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던 유영경(柳永慶)을 몰아낸 처사를 들어 이산해·이경전(李慶全) 부자와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를 극렬히 비판하다 파직 당하였다. 이어서 1618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사건을 주동한 병조판서 유희분(柳希奮)에게 대의(大義)를 논하는 글을 전하였다가 가산을 적몰 당하였다.
 
 
3)윤진(尹軫, 1548∼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방(季邦), 호는 율정(栗亭). 아버지는 강원(剛元)이며, 어머니는 현감 이시영(李時榮)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고, 효행이 뛰어나 음서(蔭敍)에 의하여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임명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경수(金景壽)를 맹주로 한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여 종사로 활약하였다. 이듬해에는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여올 것을 예견하고, 전라도관찰사 이정암(李廷馣)에게 입암산성(笠巖山城)의 수축을 건의하였다. 이 산성은 왜란 전에 약간의 수리공사가 이루어졌으나 중단된 상태였으므로, 이의 속행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이 건의가 허락되어 군량을 저축하기 위한 창고를 건축하고 포루를 새로 마련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1597년 왜적이 남원을 유린하고 장성에 침입하자, 그는 수 백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입암산성을 사수하려 하였으나 힘이 부쳐 산성의 함락과 함께 순국하였다. 그의 처 권씨도 남편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승지를 추증하였으며, 산성 내에 순절비를 세워 충절을 기리도록 하였다.
 
4)변휴(邊烋, 1640~1699)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자는 미경(美卿), 호는 청유당, 본관은 황주이다. 망암의 현손으로 일찍이 학문에 밝아 명유인 동춘 송준길, 현석 박세채, 명재 윤증, 구천 이세필 등 제공과 공유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5)변윤중(邊允中, ?~1597)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공신(公信), 호는 휴암, 본관은 황주이다. 학행으로 상의원직장에 임명되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향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휴암에서 황룡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 처 함풍이씨·며느리 장성서씨가 같이 순절하여 삼강정려를 세웠다.
 
6)변덕윤(邊德胤, 1593~1655)
조선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황주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나통서 유집 등과 같이 의병을 모집 청주까지 올라갔으나 치욕적인 강화조약으로 의병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최명길이 천거하여 사옹원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7)변치명(邊致明, 1693~1775)
조선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묵포공, 본관은 황주이다.
1722년(경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750년(영조 26) 성균관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전시병과로 합격하였다. 이어 승정원주서·승문원정자·이조·예조·병조의 좌랑·정랑 등을 지내고, 1753년 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보덕·한성부우윤·승정원승지 등을 거쳐 176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 묵포집이 있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 동서 양재 강학공간을, 내삼문, 사당으로 배향공간을 이루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건물로는 3칸의 종앙사(宗仰祠), 내삼문(內三門), 7칸의 성경당(誠敬堂), 4칸의 훈덕재(薰德齋), 4칸의 경의재(景義齋), 외삼문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참고-장성군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