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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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강성서원(江城書院)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늑룡리 664
   문익점(文益漸) 문위세(文緯世)
   1644년(인조 22)
   1785(정조 9)
   9월 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0호(1984.02.29지정)
문익점(文益漸)과 문위세(文緯世)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원래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문위세를 향사하기 위해 1644년(인조 22) 월천사(月川祠)를 세운 것에서 비롯됐다.
1702년(숙종 28) 사우로서의 건립절차와 규모를 새로 마련하였고, 1734년(영조 10)에는 문익점을 추배하면서 그를 주벽으로 하고 문위세를 배향케 되었다. 1785(정조 9)에는 전라도 유생 600여명이 이들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할 것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리게 되자 이에 조정으로부터 ‘강성’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이후 1868년에 훼철된 후, 1894년 후손 문정원, 문욱호 등에 의해 설단(設壇)되었고, 1905년에는 강당을 중수하였다. 또한 1929년에는 신실인 숭덕사를 중건하였다.

1)주벽-문익점(文益漸, 1329∼1398)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숙선(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襄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2)문위세(文緯世, 1543~1600)
류희춘과 이황(퇴계)의 문하로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다. 일찍 퇴계선생이 공의 자질을 간파하시고 팔진도(제갈공명 병법)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1595년(선조 28) 용담현령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600년(선조 33) 파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 원개(元凱)ㆍ영개(英凱)ㆍ형개(亨凱)ㆍ홍개(弘凱)가 모두 창의하니 충절의 모범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장흥의 강성서원(江城書阮)에 제향 되었다. 문집이 있다.

사당(祠堂)인 숭덕사(崇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 반칸을 툇간으로 개방하였다. 양박공면에는 바람막이 판을 설치하였고 처마는 겹처마로 꾸몄다. 가구는 1고주 5량 가이다. 강당(講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내・외삼문을 갖추고 있다.

참고-목포대학교박물관. 전라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