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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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원서원(道源書院)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915번지
   최산두(崔山斗) 임억령(林億齡) 정 구(鄭 逑) 안방준(安邦俊)
   1670년(현종 11)
   1687년(숙종 13)
   3월 15일, 9월 15일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2001.7지정)
조선시대 전기에 동복(同福)에 연고를 맺고 유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던 최산두(崔山斗), 임억령(林億齡), 정구(鄭求), 안방준(安邦俊) 4위를 배향한 사우이다. 현재 전해지는 기록으로 도원서원의 창건은 1670년(현종 11)인 듯하나 몇 가지 검토가 필요하다. 즉 이 1670년이라는 창건연대는≪동복읍지≫,<도원서원건상량문>등의 기록과≪여지도서≫(1759),≪열읍원우사적≫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1739년 김수린(金壽麟)이 편찬한 <중수상량문>에 따르면 도원서원 강당 상량문에는 ‘康熙七年’즉 1668년(현종9)이라는 기록이 있어, 창건을 1668년으로 적고 있다. 또한 안방준의 연보(年譜)에 1657년에 안방준이 도원서원에 배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기록을 고려한다면 도원서원의 건립연대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서원가고≫는 이 서원의 건립연대를1610년(광해군 2)으로 적어 놓아 혼란을 더하고 있다. 따라서 도원서원에 관련된 여러 사적들이 더 이상 발굴되지 않는 이상 어느 기록이 정확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1676년(현종 5)에 임억령(林億齡)을 추가배양하였으며, 1687년(숙종 13)에 ‘道源(도원)’이라는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현재의 도원서원은 최산두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1975년 유허비를 건립하였고, 1977년에는 사우를, 1978년에는 동·서재를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최산두(崔山斗, 1483∼15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 아버지는 한성판윤 한영(漢榮)이며, 어머니는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사숙하였다.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사인(舍人)’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15세 때 ≪통감강목 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 번을 읽고 나오니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니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洛中君子)’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이 되어 25세에서 30세까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나자,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
1513년(중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 홍문관저작, 1516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강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 이조정랑·장령·사인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재집 新齋集≫이 있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2)임억령(林億齡, 1496∼156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 득무(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우형(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었고,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으나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3)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 ≪남명집 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4)안방준(安邦俊, 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빙호(氷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이며, 처는 경주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 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 호남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 초 지방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벼슬에 등용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선비)을 초치 등용하려 했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 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대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 : 기를 숭상함)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 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으로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 李大源傳≫·≪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삼원기사 三寃記事≫·≪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氵遀遁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현존 건물로는 사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건물의 전체 배치모습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으로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은 약 1.5m의 지반 차를 두고 있다.
소장된 유물로는 중종이 하사한 옥홀(玉笏)이 있고, 서적으로는 ≪노사집 蘆沙集≫을 비롯하여 30여 책이 있다.
참고-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