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해망서원(海望書院)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904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정여해(鄭汝諧)
   1508년(중종 3)
   
   9월 15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22호(1985.02.25지정)
해망서원은 1508년(중종 3)에 정여해(鄭汝諧)가 스승인 김종직(金宗直)과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 그 후 정여해가 죽자 방치된 것을 지역 유림들이 1871년 고종 8년 정여해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193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지었다.
1508년(중종 3) 정여해(鄭汝諧)가 그와 사우 관계가 되는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인하여 참형 당하게 되자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화순 해망산록에 해망단(海望壇)을 만들고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그 뒤 정여해를 추배하여 5위를 제향하여 왔다. 이후 1979년 9월 15일 유림과 후손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하여 그 이름을 ‘해망서원’이라 하였다.

1)주벽-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은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彛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중곤(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지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지의(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 참시되었다. 중종 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蘫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4)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할아버지는 극일(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 : 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 : 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 : 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5)정여해(鄭汝諧, 1450-1530)
정여해의 자(字)는 중화(仲和), 호(號)는 둔재(遯齋), 본(本)은 하동(河東) ,부(父)는 지영(之英), 거(居) 함양(咸陽)이다.
김종직(金宗直)선생 문하(門下)에 나아가서 용학(庸學)을 공부(工夫)하엿으며 한훤(寒暄), 일두(一蠹), 추강(秋江) 제선생(諸先生)으로 더불어 강마(講磨)하여 경전(經傳)의 오의(奧意)를 궁구(窮究)하되 알지 못하고 그만 두지는 않았다. 1480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였고 효(孝) ‧ 염(廉)으로 천(薦)되여 삭주(朔州) 교수(敎授)에 제수(除授)되었다.
1487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특진(特進)되였으나 허명(虛名)으로 벼슬 할 수 없다하며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1598년에 사화(士禍)가 일어 날 때 신구소초(伸救疏草)를 구성(構成)하여 순천(順天)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배소(配所)에가서 소초(疏草)를 보이니 한훤당(寒暄堂)이 손잡고 만류하며 소초(疏草)를 불살랐다. 공(公)은 통곡(痛哭)하며 돌아와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자호(自號) 둔재(遯齋)이라 하였다. 후일 전남(全南) 화순(和順)의 숭의사(崇義祠)에서 김종직을 주벽(主壁)으로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서원 경내에는 숭의사, 구인당,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다. 건물의 배치를 보면 해망서원과 강당이 앞쪽으로 나란히 있으며 뒤편으로 이지문을 두고 그 뒤편으로 숭의사가 있다. 서원 건물인 구인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건물로 겹치며 팔작지붕이며 강당인 연락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신설인 숭의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1989년 단청과 강당 및 숭의사의 번와를 하였고 1993년, 1996년에 서원을 보수하였다.
소장전적으로는 ≪돈재문집 遯齋文集≫ 등 20여 종의 문헌이 있다.
참고-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