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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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환봉서원(環峰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
   천만리, 천상, 천희
   환봉사(1961년), 환봉서원(2003년)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
   
1843년에 발행된 영양천씨 수보에서는 천만리 장군의 묘소가 남원임을 분명히 명기해 놓고 있다. 따라서 문중의 관심도 크게 높아져 1856년에 이르러서는 사우건립을 위한 예조의 허가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착공은 지지부진하였는데 그 후 1868년(고종5년)에 이르면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이 전격 공표되면서 당분간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기존의 서원도 대부분 폐쇄되는 마당에 신규 개설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우건립은 별도로 하고 1869년부터는 남원지역 유림과 함께 본손이 참여하는 춘계제향이 성대하게 개최되었으니 이 행사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1870년 묘혈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됨으로써 틀림없는 천만리의 묘소임이 확인되어 당시까지만 해도 묘소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이 있었는데 비로서 이 문제가 해소되었다. 1876년 묘비와 상석을 갖추고 연이어 배위 허(許)부인의 설단을 모셨다. 1898년에는 묘역의 삼방석축(三方石築)공사와 신도비(神道碑) 건립이 완료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재실 추원재(追遠齋)건립도 추진하였으나 자금난에 봉착 결국 사업이 표류하다가 1930년에가서야 준공하였고 3년후인 1933년에는 다시 대형 신도비를 기존의 것과는 별도로 건립하였다. 환봉사 건립사업은 해방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니 1961년 마침내 사우 환봉사와 강당인 개념당(愾念堂)등 핵심시설이 준공되었다. 1865년 예조의 승인이 있은지 무려 105년 만에 환봉사 건립등 남원 성역화사업이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환봉서원의 전신인 환봉사는 금지면 방촌리에 있는데 1961년에 창건하였다. 환봉사에는 영양(穎陽) 천씨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를 주벽으로 삼고 그 아들 천상(千祥)과 천희(千禧) 2현을 봉안하고 있다.
그 후 환봉사는 1989년 중건사업이 결의되고 14년 후인 2003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2003년 4월 5일(양력) 준공식과 더불어 유서깊은 춘향대제가 봉향되었는데 어느덧 뜻있는 영양천씨들의 필수 참례코스가 되어 꾸준히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1) 천만리(千萬里 1543~ ? )
천만리는 1543년에 태어나서 13세에 어린나이로 경과시에 합격하여 황제의 후한상을 하사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더니 1571년의 무과시 에서도 또한 장원급제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1575년에 충절사의 임명을 받고 복로에 승진하여 큰공을 세우자 이듬해인 1576년에 황제의 명으로 내의 전부사에 보임되어 궁궐 정비의 중책을 발았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여송장군을 따라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정유재란(1597년)때에도 울산(蔚山)싸움에 공을 세우고 싸움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 영주하기를 희망하여  조선에 귀하하니 조정에서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또한 훗일에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했으며 30결(結)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下賜)하고, 맏아들 상(祥)은 한성부 좌윤 ( 漢城府左尹) 에, 차남 희(禧)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 )에 각각 임명 하였다.
그후 숙종(肅宗) 때 왜란 평정의 은혜(恩惠)를 잊지 못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으며 순종(純宗) 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순조때는 고성군 호암서원에 봉안하고 헌종때에는 청도군의 황강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때에는 문경군의 노양각, 진주의 만첨각, 안동의 동산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 33년 (1896)에는 이곳 금지면에 환봉사를 세웠다.  풍수지리에 능한 이여송 장군이 이곳 고리봉 기슭에 명당을 잡아 안장했는데 이 무덤자리를 풍수지리학에서는 무자 천손지지(無子 千孫之地) 라고 했는데 '아들은 없는데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는 묘자리'가 된다.
 
2) 천상(千祥)
천만리의 아들 천상은 아호를 오헌(吾軒)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아버지 화산군(花山君)을 따라 우리나라에 건너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벼슬이 오위 도총관(五衛 都總管)에 이르렀다.
 
3) 천희(千禧)
천만리의 아들로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