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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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삼천서원(三川書院)-미복설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황산리
   안 회(顔 回) 정 호(程 顥) 정 이(程 頤) 주 희(朱 熹) 제갈량(諸葛亮)
   1667년(현종 8)
   1695년(숙종 21)
   
   
황산마을 앞에는 금강이 그 지류인 주자천과 합수하여 그야말로 삼천(三川)을 이루고 있다. 그 곳은 예전에 이름이 마산담으로서 용담(龍潭), 용추(龍湫), 용연(龍淵) 등으로 불리었으며 용왕신이 있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하여 조선 말기까지도 황산 마을부근에는 능진명 소사(能津溟 所祠)壇이 있었고 용담현에서는 그곳에서 매년 봄 가을에 마산당의 용왕신을 제사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마산담에서 용담현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거니와 삼천서원의 이름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삼천서원은 1667년(현종 8)에 용담현령 홍석이 창건하여 안회(顔回)·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제갈량(諸葛亮) 등 중국인들을 배향하였고 1695년(숙종21)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명으로 철폐되어 지금은 그 서원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비석 하나만 남아 있다.

1)주벽-안회(顔回, BC 521~BC 490)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현인.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였다. 은군자적인 성격으로 “자기를 누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켰다.
 
2)정호(程顥, 1032~1085)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3)정이(程頤, 1033~1107)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4)주희(朱熹, 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정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5)제갈량(諸葛亮, 181~234)
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당시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 희성재(希聖齋), 사숙재(私淑齋), 심락당(尋樂堂), 재천루(在川樓) 등이 있었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 왔다.

1)삼천서원 묘정비
황산마을 북쪽 용담~금산간 도로에서 60m떨어진 산비탈의 밭 가운데 둑이 서 있던 묘정비는 현재 용담 태고정 앞에 세워져 있다. 비신은 높이 155cm, 너비 57.5cm, 두께 26.5cm)은 차돌이며 가첨석이 있다. 이  비석은 1732년(영조 8) 9월에 세워진 것이다.

참고-진안군사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