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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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무성서원(武城書院)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최치원(崔致遠)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 관(金 灌)
   1484년(성종 15)
   1696년(숙종 22)
   2월, 8월 중정(中丁)
   사적 제166호(1968.12.19지정)
이 서원은 신라 말의 유현(儒賢)인 최치원(崔致遠)과 조선 중중 때 태인현감이었던 신잠(申潛)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였던 것을 1696년(숙종 22)에 사액됨으로써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신라 정강왕 1년에 태산군수(泰山郡守)로 와서 있는 동안 치적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여 생전에 월연대(月延臺)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이 사당은 고려 말에 훼파(毁破)되었다가 조선 1483년(성종 14)에 유림들의 발의로 월연대(月延臺)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1544년(중종39)에 태인 현감이던 신잠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1549년(명종4)에 강원도 간성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1696년(숙종 22)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아 이 두 사당을 병합하여 무성서원이라 했으며, 삼현(三賢)을 더 모시다가 뒤에 두 분을 더 모시니 칠현(七賢)을 더 배향하게 되었다. 배향된 분은 최치원, 신잠,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黙), 김관(金灌) 등이다. 그 뒤 1784년(정조 8)에 쌍계사로부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였다.
무성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의 현감 유림 등이 청원하여 화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전라도의 철폐령에서 제외된 3개 서원으로 필암서원(筆巖書院), 포충사(褒忠祠), 무성서원(武城書院) 중 하나이고 원노(院奴) 30명,세미(稅米) 3결(약 9000평)을 보조 받기에 이르렀다.

1)주벽-최치원(崔致遠, 857∼? )
신라 하대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또는 本彼部)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2)정극인(丁克仁, 1401∼1481)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국조방목≫에는 寅의 아들로 되어 있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으로 남귀(南歸),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 자호 또한 이를 사용하였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썼다.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의 은전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역권(力勸)으로 전시(殿試)에 응시, 급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하였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으로 특승되었고, 또 척불론을 펼치다가 하옥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1470년(성종 1) 치사(致仕:나이가 많아서 관직을 내어놓고 물러남),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 不憂軒歌>·<불우헌곡 不憂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志槪)와 풍도(風度)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별세하였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하였다. 정극인은 원래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 송세림(宋世琳)의 <동중향음주서 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다.
 
3)송세림(宋世琳, 1479∼?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헌중(獻仲), 호는 취은(醉隱)·고은(孤隱)·고송(孤松)·눌암(訥庵). 계성(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복리(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연손(演孫)이며,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가 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상을 당하여 초상 중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벼슬에 오르지 않아 갑자사화를 면하였다. 이 때문에 스스로 ‘취은’이라 호하였다.
이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16년(중종 11) 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재직중 방납(防納)폐단의 제거, 책 인쇄로 인한 과중된 잡세(雜稅)폐지, 군액(軍額)충당을 위한 중〔僧〕의 추쇄(推刷 : 세금수취의 인정단위가 될 수 있도록 일반 백성으로 환속시킴.)와 절〔寺〕의 소각, 우전입마(郵傳立馬 : 역참의 말을 길러 공용에 이용하던 제도)의 폐에 대한 개선 등을 내용으로 한 지방행정제도 개혁안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 상소로 중종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벼슬도 가자(加資)되었다. 뒤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하였다. 당대 문명을 떨쳤고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어면순 禦眠楯≫이 있다.
4)정언충(鄭彦忠, 1706∼177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이(國耳), 호는 구옹(龜翁). 유석(有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태주(泰周)이고, 아버지는 문서(文瑞)이며, 어머니는 소영(蘇瑛)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8년 사헌부지평으로서 사간원정언 권항(權杭)과 함께 정시무과 초시에서 59인을 합격시킨 것은 원액(原額) 150인에는 태부족이므로 이에 따른 문제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붕당의 폐를 논하기도 하였다. 1754년 사헌부장령으로 천보되어 당시 국가시책의 급선무로서 붕당을 없애고 국가기강을 세우며, 언로를 개방하고, 백성의 생활안정을 추구하며, 군비를 갖추는 일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해10월 좌의정 김상로(金相魯)에 의하여 헌관(憲官)으로서 체통이 없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56년 장령에 다시 임용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1768년 나주목사로 전보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형조참판에 임용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96년(정조20) 판윤 권엄(權儼)에 의하여 청백리로 천거되었다.
 
5)김약묵(金若默, 1500∼155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진(康津). 자는 태용(太容), 호는 성재(誠齋). 할아버지는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참봉 희석(希奭)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으로 연손(演孫)의 딸이다. 1540년(중종 35)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록(司錄)·전적(典籍)·감찰, 형조·예조의 좌랑, 직강(直講) 등을 지냈다. 1552년(명종 7) 한산군수가 되었을 때 검소하고 근면한 관리로 표창을 받고,이듬해 다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을 받았다.
그 뒤 집의(執義)·사성(司成)·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1557년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학행이 있었으며 김인후(金麟厚)의 묘지명을 지었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제향되었다.
 
6)김관(金灌, 1575~1635)
도강인(道康人)으로 자(字)는 옥(沃)이다. 호(號)는 명천(鳴川)이니 선조 8년(宣祖 1575) 5월 25일에 고현내(古縣內)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성장하면서 불우헌, 눌암 등이 세워 내려온 향학당(鄕學堂)의 규약에 따라 학문을 가르쳤다. 광해 7년(光海 1615)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을 하였으나 그 때 광해의 난정(亂政)으로 폐모(廢母)에 이르자 향리에서 송치중(宋致仲), 김담(金湛) 등과 송정 십현지회(松亭 十賢之會)를 만들어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인조 5년(仁祖 1627)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김사계(金沙溪)를 따라 창의(倡義)하여 의곡 (義穀)을 모집하는데 성심을 다하였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을 모면한 몇 안 되는 서원으로서 그 규모가 잘 남아있다.
문루(門樓)인 현가루(鉉歌樓)는 원주(圓柱)를 쓴 2층으로 된 3칸 기와집이며, 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기와집인 강당(講堂)이 있고, 3칸 대청(大廳)과 그 좌우에는 단칸 협실(夾室)이 있으며, 그 우측의 강수재(講修齋)는 4칸, 좌측의 흥학재(興學齋)는 3칸이며, 합하여 동·서재를 이루고 있다. 고사(庫舍)는 3칸이다.
사우는 성종 15년에 지었으나 현재의 것은 1844년에 중수한 것으로 현존하는 사우 중 가장 오래 된 것의 하나이며, 강당은 1825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82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 서원에는 성종 17년(1486)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생록(院生錄), 원규(院規)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를 지니고 있다.

참고-정읍시사, 전북문화재대관(1997)
한국민족문화대사전, 정읍시청 홈페이지
http://culture.jeongeup.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