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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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남고서원(南皐書院)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보림리 537
   이 항(李 恒) 김천일(金千鎰)
   1577년(선조 10)
   1685년(숙종 11)
   2월, 8월 중정(中丁)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76호(1981.04.01지정)
이 서원은 1577년(선조 10)에 창건하여 호남의 대 성리학자 이항(李恒)과 그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천일(金千鎰)을 배향하였다. 효종 때부터 사액하여 주기를 상소(上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85년(숙종 11) 4월에야 남고서원이라 사액되었으며, 그해 예조좌랑(禮曹佐郞) 한성우를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그 후 1871년(고종 8)에 철거 되었던 것을 후손들이1899년(광무 3)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서원에는 처음에 주벽인 이항과 김천일이 배향되었고, 중건할 때에 김점(金坫)과 김복억(金福億)이 추배되었으며, 1913년에는 다시 소산복(蘇山福)이 배향되었다. 1970년(庚戌)에 국가보조(國家補助)를 받아 서원을 고쳤고, 1975년(乙卯)에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로부터 문화재(文化財) 제76호로 승인되어 1977년(丁巳)에 또 국가보조를 받아 단청(丹靑)을 했다.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각각 제사를 드린다.

1)주벽-이항(李恒, 1499∼157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인 자영(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소경전참봉 인우(仁遇)의 딸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다.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 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 (奇大升)·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기(理氣)를 논함에 있어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을 일체라고 주장해 이황(李滉)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1566년(명종 21)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어 사축승전(司畜承傳)에 임명되었다. 왕에게 진학(進學)과 치지(致知)하는 방법을 진언하여 칭찬을 받았다.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지내고 임천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할 때 왕이 귀마개를 하사해 노고를 위로하였다. 1567년 5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오니 왕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초년에 의빈경력을 지내고 선공감부정·사옹원정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 7) 사헌부장령을 거쳐 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이 악화되어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 뒤 5도의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고, 왕이 네 차례나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결국 완쾌되지 못하였다.
홍직필(洪直弼)은 그의 글에서 호남의 5학(學)을 설명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이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일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김천일(金千鎰, 1537∼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함(瑊)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3)김점(金坫, 생몰년미상)
부안김씨(扶安金氏)이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다. 자(字)는 경숙(敬叔)이고, 호(號)는 매당(梅堂)이다. 석옥(錫玉)의 아들로 부안(扶安) 옹정(瓮井)에서 태어 났다.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이항(李恒) 문하에서 손꼽히는 인재(人才)이다.
명종(明宗)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후에 천거(薦擧)되어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사화(士禍)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그만두고 고부(古阜) 우일(雨日)에서도 살았고, 망제산(望帝山)아래 오공동(五公洞: 지금 井邑市 農所洞 望帝 부락) 골짜기 석벽(石壁) 아래에 척심정(滌心亭)을 짓고, 기대승(奇大升), 김인후(金麟厚)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으며, 그 곳에서 소요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지금도 척심정 유허비(滌心亭 遺墟碑)가 서있다.
8대손(八代孫) 영수(永洙)가 쓴 가장(家狀)이나, 세자세마(世子洗馬) 이도중(李度中)이 쓴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보아도 낳고 간 연대(年代)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4)김복억(金福億, 1542~1600)
도강김씨(道康金氏)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문신(文臣)이며 의병(義兵)이다. 자(字)가 백선(伯善)이며, 호(號)는 율정(栗亭)이다.
1524년인 중종(中宗) 19년(甲申) 고현내(古縣內: 지금의 七寶面)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재(誠齋) 김약묵(金若默)의 아들로 이항(李恒) 문인(門人)이며 기대승(奇大升), 정철(鄭澈), 이준민(李俊民)과 서로 사귀었다.
선조(宣祖) 2년(乙巳)인 1569년에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목청전(穆淸殿)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고, 얼마 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옮겨졌다.
선조(宣祖) 6년(癸酉)인 157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회덕현감(懷德縣監), 사옹원(司饔院) 판관(判官),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내고, 김제군수(金堤郡守)에 이르렀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재종제(再從弟) 군자직장(軍資直長) 김후진(金後進: 遠慕堂), 계제(季弟) 주부(主簿) 김경억(金慶億), 재종질(再從姪) 별제(別提)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 김여백(金如白: 遠慕堂의 큰아들), 이수일(李守一: 李一齊 의 큰아들),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등과 같이 의병(義兵)과 의곡(義穀)을 모집하여 진중(陣中)에 보냈다.
선조(宣祖) 26년(癸巳)인 1593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고, 뒤에 이천부사(利川府使)에 除授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지은 호(號)를 사우당(四憂堂) 이라 하였으니, 네가지 근심은 신우(身憂), 도우(道憂), 군우(君憂), 민우(民憂)를 말한 것이다.
 
5)김승적(金承績, 1549~1588)
언양김씨(彦陽金氏)이며, 字는 누립(累立)이며, 號는 용암(鎔巖)이다. 1549년인 명종(明宗) 4년(己酉)에 금구(金溝) 거야(巨野)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높으며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여 사림(士林)들로 부터 추앙(推仰)을 받았던 사람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588년인 선조(宣祖) 21년에 나이 40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했으나, 과거(科擧)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과 양친(養親)에만 뜻을 두고 힘쓰니, 그 지극한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음인지 이적(異蹟)이 많았다고 전하여 내려 온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우와 같이 시묘(侍墓)생활을 하고, 만년(晩年)에는 조폭동(造瀑洞) 용추(龍湫) 위에 두어칸(間)) 집을 짓고, 편액(扁額)을 용암이라 했다.
 
6)소산복(蘇山福, 1556~1620)
진주인(晉州人)이다. 자(字)는 경응(慶鷹), 호(號)는 매헌(梅軒)이며, 국필(國弼)의 아들이다. 남원(南原) 적과방(迪果坊) 만적동(晩迪洞)에서(지금 남원시 덕과면 만동) 1556년인 명종(明宗) 11년(丙辰)에 태어나, 어려서 이성춘(李成春)에게 글을 배웠고,뒤에 형 해복(海福)과 같이 이항(李恒)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다. 머리가 명석하며,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천문(天文)과 산학(算學)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1591년인 선조(宣祖) 24년(辛卯)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이듬 해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했으며,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를 왕래하기도 했다.
직산(稷山) 싸움에 나갔으나 병으로 돌아왔고, 뒤에 부모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를 하며 종군(從軍)하지 못하고, 김천일(金千鎰)이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니 함께 죽지 못했음을 탄식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향리에 수칸(數間) 집을 지어 편액(扁額)을 문류정(門柳亭 또는 梅軒)이라 하고, 민여주(閔汝住), 오정길(吳廷吉), 김선(金宣), 이점(李漸), 안창국(安昌國), 최행(崔荇),양명원(梁明遠), 안극충(安克忠) 등 여러 명사(名士)들과 종유(從遊)하며 만년(晩年)을 보냈다. 1620년인 광해(光海) 12년(庚申) 11월 19일 세상을 마쳤다.

현재의 건물로는 사우(祠宇)를 비롯하여 내삼문, 강당, 외삼문 등이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며,처마는 겹처마이다. 건물은 잡석의 축대위에 세워졌으며, 기둥은 전면 앞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나, 건물자체에는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전면 중앙에는 사분합의 교살문이 있으며, 좌우 양측에는 같은 형식의 외여닫이를 달았다.
강당은 잡석의 축대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의 강당은 중앙의 2칸은 대청이며, 좌우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일재 이항(一齋 李恒) 선생의 문집(文集)과 그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참고-정읍시사2003, 전북문화재대관(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읍시 홈페이지
http://culture.jeongeup.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