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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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월강서원(月崗書院)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백 장(白 莊) 송보산(宋寶山) 김남택(金南澤) 최경회(崔慶會) 백여옥(白如玉) 김남중(金南重) 송수산(宋壽山)
   1828년(순조 28)
   
   (음) 3월 6일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장군이 전라도 동북방면의 방어임무를 띄고 돌아와 창의소를 차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조련하면서 장대를 차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1828년(순조 28)에 향중 사림의 장계에 의하여 예조에서 인가를 얻어 사당을 세웠다. 이 지방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4분을 모셨으니 고려조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에 있다가 이태조(李太祖)가 모반함에 벼슬을 버리고 둔적하였으나 태조와 태종의 부름에 불응하여 다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장수현 임내면 호덕동에 유배되어 여생을 마친 고려수절사(高麗守節臣) 정신재(靜愼齋) 백장(白莊)을 필두로 백 선생의 손서(孫壻)이며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낙향한 퇴휴재 송보산(退休齋 宋寶山)과 역시 백선생의 손서가 되는 이조판서 손재 김남택(遜齋 金南澤), 장수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장수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무찔러 공훈을 세우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충의공 일휴당 최경회(忠毅公 日休堂 崔慶會)의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년) 사액서원 48개소를 제외한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거하였으니 사림의 원성이 높았다. 광복 후 1948년에 장수유림의 복설 발의로 재건되었다. 1974년에는 백여옥(白如玉), 김남중(金南重), 송수산(宋壽山)을 추가 배향하였다.

1)주벽-백장(白莊)
고려조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에 있다가 이태조(李太祖)가 모반함에 벼슬을 버리고 둔적하였으나 태조와 태종의 부름에 불응하여 다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장수현 임내면 호덕동에 유배되어 여생을 마쳤다.
 
2)송보산(宋寶山)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인(大仁)이며 호는 퇴휴재(退休齋)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탐독하여 특히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며 정여창(鄭汝昌)과 도의로 깊이 교유하였다. 1429년 세종(世宗) 11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전적(典籍), 병조(兵曹) 예조의 정랑(正郞), 사헌원의 정언(正言) 헌납(獻納),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을 거쳐 세종 20년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가 1449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단종(端宗)이 폐위(廢位)되고 세조(世祖)가 등극하자 이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장수(長水) 임남면 침령(砧嶺)에 은거하였다.
 
3)백여옥(白如玉)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호는 경재(敬齋)이며 장(莊)의 아들이다. 황희의 문인이며 전통문학을 터득하고 도학(道學)과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당대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아버지와는 달리 조선조에 출사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덕망과 학문이 높아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4)김남택(金南澤)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수(聖洙) 호는 손재(遜齋)이며 남중(南重)의 형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1402년 태종(太宗) 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박사(博士) 수찬(修撰) 정랑(正郞) 사간(司諫)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1408년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발탁되었다가 1425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보직되었다. 만년에 보직을 버리고 경상도 하동에 퇴거하였다가 장수 침령(砧嶺)에 옮겨 휴학의 진흥에 힘썼다.
 
5)김남중(金南重, 1596∼166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自珍), 호는 야당(野塘). 만균(萬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명원(命元)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수렴(守廉)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순(恂)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1623년(인조 1) 검열이 되었다. 이듬 해 회답사(回答使)정립(鄭岦)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1625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변경의 오랑캐 침입을 잘못 보고해 파직당했다.
뒤에 곧 기용되어 수찬·교리·지평·장령을 거쳐 1628년 부수찬이 되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신병으로 휴가를 청했다가 연소한 관료가 나태하다 하여 두 번 째 파직되었다. 다시 장령으로 기용되어 그 뒤 사간·시독관·부응교를 거쳐 1632년 집의가 되고 추숭도감도청(追崇都監都廳)을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 해 대사간이 되자 강화도 함락에 대한 수장(守將)의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과, 척화신(斥和臣)을 문책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생일에 여러 읍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전주에 내려가 가족과 어울려 가무연락(歌舞宴樂)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 당하였다.
1641년에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우부빈객·도승지를 거쳐 1644년에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대사헌이 된 뒤1649년(효종 즉위년)까지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을 번갈아 지냈다. 1650년 이조참판이 되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을 거쳐 1656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공조참판·대사헌이 되었고, 이듬 해 예조참판·도승지가 되었다.
1658년 공조판서에 오른 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60년 겸지춘추관으로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 해 공조판서가 된 뒤 형조판서·예조판서·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역대인감 歷代人鑑≫이 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6)최경회(崔慶會, 1532∼1593)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능주(綾州) 출신. 충(冲)의 후손이며, 혼(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범(尹範)이고, 아버지는 천부(天符)이다. 경장(慶長)의 형이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영해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라남도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운(慶雲)·아우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는 고경명(高敬命)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 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 읍지에 그의 <투강시 投江詩>가 실려 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 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7)송수산(宋壽山)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며 보산(寶山)의 아우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세종 조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일하여 형제가 같이 판서로 근무하는 영광을 누리었다. 전통문학을 전수받고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두루 걸쳐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도학과 문학으로 이름 높았다. 1456년에 세조가 등극하자 형 보산과 함께 장수군 임상면 침령(砧嶺)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강당, 고사(庫舍), 행랑,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백장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송보산, 백여옥, 김남중, 최경회, 김남택, 송수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행랑은 공부하는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사용하며, 고사는 관리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사선생사실록 四先生事實錄≫ 1책 등 40여 권의 문헌
참고-장수군지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