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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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압계서원(鴨溪書院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산76
   육 려(陸 麗) 박옥산(朴玉山) 박이항(朴以恒) 박이겸(朴以謙)
   1789년(정조 13)
   
   3월 17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35호(1984.04.01지정)
1789년(정조 13)에 창건되었고 창건 당시에는 고려조의 명관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를 역임하고 오도관찰사(五道觀察使)의 직에 있었던 옥천인 육려(陸麗)를 위시하여 성종조의 박옥산(朴玉山),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덕망이 높은 밀양인 박이항(朴以恒) 등 3분의 신위를 모셨다. 1798년(정조 22)에 박이겸(朴以謙)을 추배하였으며 1799년(정조 23) 옥산 전설(全渫)을 추배하여5위의 선생을 모시게 되었다. 또 그해에 강당 울흥재(蔚興齋)를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의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후손들이 설단(設壇)하여 제사만은 모셨으나 광복 후 유림의 발의에 의하여 1958년 복설하였다. 전설은 후손의 의견에 따라 향사에서 제외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육려(陸麗)
고려 말 무신.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일중(日中), 호는 덕곡(德谷)이다. 관성군(管城君) 보(普)의 후예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를 역임하고 오도관찰사(五道觀察使)의 직에 있었다. 1384년 우왕(禑王) 9년 만주적(滿州賊) 호발도난(胡拔都亂)에 황희석(黃希碩), 이지란(李芝蘭) 등과 함께 진격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 후 왜구 내침 때에도 경주에 가서 큰 공을 세웠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척불(斥佛)의 상소(上疏)를 올리고 유학의 진흥에 힘썼다. 조선이 건국하고 이성계가 왕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대전(大田) 덕리(德里)에 은거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이 마을 이름이 육덕리(陸德里)라 전해 온다.
 
2)임옥산(林玉山)
조선전기 효자로 본관은 조양(兆陽)이며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국헌(菊軒)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특출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1451년 문종(文宗) 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6년 세조(世祖) 2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직장(軍器直長)이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자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시묘(侍墓)를 생략하고 3년 성묘를 극진히 하였다. 1496년 연산군(燕山君) 2년 능성현감(綾城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다가 뒤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성종조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3)박이항(朴以恒)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효자로 자는 덕구(德久), 호는 비암(秘巖)이고, 본관은 밀양이다. 박이겸(朴以謙)의 아우이며 형과 같이 친병(親病)에 효행이 있었고 시묘도 형과 함께 극진히 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덕망이 높았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가 증직되었다.
 
4)박이겸(朴以謙, 1553∼161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후(德厚), 호는 의재(毅齋)·삼암(三巖). 옥천(沃川)에서 태어나 주계(朱溪 : 전라북도 무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충좌위 부사직(忠佐衛副司直) 충현(忠賢)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 화순현감(和順縣監)준(埈)의 딸이다. 삼종숙(三從叔)인 사종(嗣宗)의 문인이다.
그가 20세 되던 해에 영남을 주유하며 당시의 거유들을 찾아뵈면서, 조식(曺植)에게서는 출처(出處)의 의리를, 정구(鄭逑)에게서는 성리설(性理說)과 예악형정설(禮樂刑政說) 등을 듣고서는 집에 돌아와 삼암(三巖)에 정자를 짖고 후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외가를 따라 성주(星州)로 이사하여 살기도 하면서 무주(茂朱)와 성주에서 각기 향천(鄕薦)을 입었으나 벼슬에 나가지는 못하였고, 그의 나이 33세때 암행어사 목장흠(睦長欽)의 천거로 정릉참봉(貞陵參奉)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중용≫과 ≪대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으며, 그에서 얻어진 공부를 한글로 <입덕문가 入德門歌>라는 가사(歌詞)로 옮겨 누구나 쉽게 학문을 터득하도록 읽혔으며, 또 세속이 술을 너무 쉽게 마시는 것을 금지하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이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증직되었고, 무주의 압계서원(鴨溪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삼암유고≫ 2권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상의문(尙義門), 4칸의 울흥재, 산앙문(山仰門), 협문(夾門), 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육려, 임옥산, 박이겸, 박이항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상의문은 내신문(內神門)이며, 울흥재는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이 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3월 17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죽림서원지 竹林書院志≫ 1책 등 50여 종의 문헌, 압계사사적비(鴨溪祠事蹟碑)
참고-장수군지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1994
장수군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