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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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사동서원(社洞書院)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 170번지
   김극일(金克一) 김종직(金宗直)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 김대유(金大有) 김치삼(金致三) 김정택(金挺澤)
   1847년(헌종 13)
   
   음력 3월 22일
   
이 사우는 조선 1847년(헌종 13)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던 것을 1957년 복설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김해김씨의 선조 가운데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 김대유(金大有), 김치삼(金致三), 김정택(金挺澤)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복설하면서 김극일(金克一)을 추배하고,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김종직(金宗直)을 추배하고 김극일을 주벽으로 하였다.

1)주벽-김극일(金克一,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용협(用協), 호는 모암(慕庵). 할아버지는 항(伉)이고, 아버지는 의흥현감(義興縣監)서(湑)이며, 부인은 한성부윤 이간(李暕)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고, 장성한 뒤에는 장인의 간곡한 사관요청이 있었으나, 양친의 봉양을 이유로 거절하고 성심을 다하여 봉양하는 등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아들 맹(孟)은 물론 손자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의 훈회에도 정성을 기울여 이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학식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치는 토대를 이루게 하였다.
세종 때 청도군수 이기(李掎)의 보고에 따라 효자정려(孝子旌閭)가 건립되었고, 1482년(성종 13) 김종직(金宗直)이 찬한 효자문비가 다시 건립되었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시(私諡)는 효절(孝節)이다.
 
2)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은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할아버지는 극일(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 : 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 : 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 : 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4)김준손(金駿孫, 1455~?)
자는 백운(伯雲)이고 호는 동창(東窓)으로 절효 김극일 (節孝 金克一) 선생의 손자이며 남계 김맹(南溪 金孟) 선생의 장자로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의 백씨이니, 1482년(성종 13년)에 알성과 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거쳐 중시(重試)에 장원을 하였을 때 선생은 교리요, 중제 매헌 김기손(梅軒 金驥孫) 선생은 이조좌랑(吏曹佐郎)이며 계제 탁영 김일손(季第 濯纓 金關孫)선생은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이어서 삼형제가 모두 청선(淸選)의 직에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해김씨 삼주(三珠)라 하였다. 1486년(성종 17년)의 중시후(重誠後)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堤學)을 지내니 사림의 중망이 한층 더 높았다.
1498년 (연산군 4년) 계제 탁영 선생의 무오사화로 인하여 호남에 유배되었는데 호남 유배지에서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규탄하는 천위사(遷位事)를 조야에 전격 (傳激)하니 삼남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충훈으로 중증반정후 연천군(燕川君)에 봉했다. 1507년 (중종 1년)에 졸하니 향년이 54였다.
1842년 (헌종 8년)에 백동사에 향사하고 1847년(헌종 13년)에 남원 사동서원 (杜洞書院)에 향사하였다.
 
5)김기손(金驥孫)
자는 중운(仲雲)이며 호는 매헌(梅軒)으로 절효 김극일(節孝 金克一)선생의 손자이며 남계 김맹(南溪 金孟)의 아들로서 일찌기 계제 탁영과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도학문장이 뛰어나 1482년(성종 13년)에 형 동창 김준손(東窓 金駿孫)과 같이 알선과에 급제하여 이조 ‧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향년 38로 졸 하였다.
 
6)김대유(金大有, 1479∼15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극일(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맹(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준손(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일손(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 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 濯纓年譜≫가 있다.
 
 
7)김치삼(金致三, 1560~1626)
자는 일지(一之)이며 호는 도연정(道淵亭)으로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의 증손이며 1560년 (명종 15)에 출생하였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門人)으로서 도학과 문장에 밖고 덕행이 높았다.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다음해 사첨시참봉(司瞻寺參奉)을 지내고 향년 66에 졸하였다. 또한 선생은 문집이 있으며 탁영 선생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8)김정택(金挺澤, 1719~?)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자는 내휘요, 호는 만회당인데, 일손의 후손이다.
1719년(숙종 45)에 산서 월곡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제출천하여 15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음에도 송종의 예와 거상의 절차를 성인과 같이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어머니 상에도 읍혈여묘(泣血廬墓)하고 예를 다하였으며 영조국상(英祖國喪)에 행소종제(行素終制)하였다.1777년(정조 1)에 생원(生員)에 올랐다. 학문에 힘써 문장이 뛰어났으며 또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동리에 설립하여 미풍양속을 장려하였다.

현재의 사동사 건물은 1986년 중건하였으며, 사당 3칸 . 강당 5칸, 내삼문과 외삼문, 전사각과 고직사가 있다.


참고-장수군 홈페이지
신종우의 인명사전
전주한옥마을 http://hanok.jeonju.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