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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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현주서원(玄洲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현계리 834
   이능간(李凌幹) 정 염(丁 焰) 김복흥(金復興) 변 유(邊 瑜) 정 견(丁 涀)
   1761년(영조 37)
   
   2월 중정(中丁)
   
본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761년(영조 37)이다. 그 뒤 고종 연간에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해방 뒤 후손들에 의해 복설되었다. 이 서원에는 이능간(李凌幹)을 주벽으로 정염(丁焰), 김복흥(金復興), 변유(邊瑜), 정견(丁涀)을 배향하였다.

1)주벽-이능간 (李凌幹, ?∼135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있을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치부하였으나 홀로 청고한 생활을 하였다.
또 충선왕이 티베트〔吐蕃〕에 귀양을 가게 되자 역졸을 시켜 금을 바쳐 왕과 호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밀직부사로 충선왕의 재궁(梓宮 : 유해를 모신 관)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그 이듬해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김이(金怡)·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원제(元帝)에게 주청하여 중지하게 함으로써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28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을 때 원에 가서 문종의 즉위와 개원(開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이어 사신으로 원에 다녀왔으며, 1341년(충혜왕 복위 2) 정승에 올랐다.
그 이듬해 정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에 조적(曺使)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다시 1등 공신에 책록되고 철권(鐵券)이 하사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또 영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영도첨의사(左政丞領都僉議事)에 올랐으며,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충선왕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일찍이 왕의 총희(寵姬)를 백문거(白文擧)와 함께 한 사람씩 물려받았으나 별실에 두고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의롭게 여겼다 한다.
 
2)정염(丁焰, 1524∼160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군회(君晦), 호는 만헌(晩軒). 아버지는 종석(終碩)이며, 어머니는 영광주씨(靈光周氏)로 만귀(萬貴)의 딸이다. 7세에 여숙(閭塾)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다가 23세 때 정황(丁熿)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9년(명종 4)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정황의 배소인 거제도로 찾아가 학문을 강마하였다.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에 들어갔고, 1567년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좌랑을 거쳐 1569년(선조 2) 능성현령이 되었다.
그 뒤 춘추관기주관·예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80년 영광군수가 되었다. 그때 임씨(林氏)와 나씨(羅氏) 사이에 소송사건이 있었는데, 명석한 재판을 진행하여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582년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안성군수를 역임한 뒤 1584년 광주목사(光州牧使), 1588년 고부군수를 지냈다.
그 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난한 공로로 1590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선되었다. 만년에는 후진교육에 힘썼고, 1603년 80세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陞資)되었다. 저서로는 ≪만헌집≫ 4권 2책이 있다.
 
3)김복흥(金復興, 1546∼160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언(景言), 호는 계곡(谿谷). 남원 출생.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 익창(益彰)이며, 어머니는 합천송씨로 참봉 세영(世英)의 딸이다. 정염(丁焰)의 문인으로서 문장이 뛰어나 14세 때 도시(道試)에서 장원하였다. 1570년(선조 3)에 생원·진사시에 합격, 별제·직장의 벼슬을 거쳐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조달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과 함께 군사기밀을 의논하는 등 왜적과 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면서 당시 명성이 높았던 이대유(李大甹)·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조찬한(趙纘韓) 등과 교유하였다. 남원의 현주서원(玄洲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계곡유고≫ 5권 1책이 있다.
 
4)변유(邊瑜)
자는 여헌(汝獻)이고, 호는 정묵재(靜黙齋)이며, 본관은 장연(長淵)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도탄 변사정의 증손으로 1606년(선조 39)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효우가 뛰어났으며, 학문이 훌륭하였다.
 
5)정견(丁涀)
자는 여활(汝活)이고, 호는 육졸(六拙)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만헌 정염의 증손으로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리(事理)와 판별력(判別力)이 분명하였으며, 성리철학에 밝았다. 그는 평생을 분수에 맞게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여 비가 새기도 하였으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3칸의 강당, 내신문(內神門), 대문 등이 있다. 강당은 관리인 집 옆 길가에 있고 사당은 뒷산 언덕에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 시멘트 기와집으로서 정면에 현주사(玄洲祠) 현판이 있다. 강당은 4칸 2칸, 팔작 시멘트 기와집으로서 정면 왼쪽에서 마루 방문 위에 면좌당(免左堂) 현주서원(玄洲書院) 현판이 있다.


참고-임실군지,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주한옥마을 http://hanok.jeon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