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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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학정서원(鶴亭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김천일(金千鎰) 박 번(朴 蕃) 박 훈(朴 薰) 홍 붕(洪 鵬) 이흥순(李興淳) 조 평(趙 平) 김원근(金元根)
   1656년(효종 7)
   
   3월 3일
   
학정서원은 1656년(효종 7) 지금의 오수면 주천리에 창건되었다. 그 뒤 1840(헌종 6)년 지금의 청웅면 구고리 원동에 이건하였으며 ‘하정서원’이라는 사액을 예조에 청원하였으나 같은 해 김천일의 원호(院號)가 다른 곳에 사액되어 중복할 수 없으므로 사액서원의 예로 향사토록 하고 관제물물목(官祭物物目)을 봉하여 현감 제주(縣監祭主)로 향사하라는 하교가 내려졌다.
1859년(철종 10) 절요(節要)를 마련 매년 3월 3일 향사하게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이르러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단(壇)을 세워 1년에 한번 제사를 모신다. 이 서원에는 김천일(金千鎰)을 주벽으로 박번(朴蕃), 박훈(朴薰), 홍붕(洪鵬), 이흥산(李興算), 조평(趙平), 김원근(金元根)을 배향하였다.
1995년 지방지치단체의 지원으로 군비보조와 유림 및 후손들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사우 3칸, 내삼문 3칸이 복원되었다.

1)주벽-김천일(金千鎰, 1537∼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감(諫)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란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2)박번(朴蕃)
자는 덕재(德材)이고 호는 인덕재(仁德齋)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그는 교수(敎授) 평(枰)의 손자이다. 그의 생졸 년대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공조 전서 상의 현손이자 현동의 아들이다. 그는 조광조에 나아가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의 병환에 대소변을 맛보아 병세를 가늠했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시묘3년을 마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가 죽은 뒤 1512년(중종 7) 그에게 정려가 내려졌다.
 
3)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본관은 함양이다. 그는 교수 평의 손자이자 번(蕃)의 종제로 조광조의 문인이다. 그는 성품이 온아하고 법도가 있었다. 그는 갑자사화를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 시묘 3년을 하였다. 그의 나이10살이었을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때 시묘를 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한이 되어 그의 나의 70에 이르자 초상(初喪) 때처럼 복(服)을 입고 시묘 3년을 마쳤다. 이로 말미암아 1543년(중종 38) 그에게 정려가 내려졌다.
 
4)홍붕(洪鵬)
자는 천유(天游)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주부(注簿) 거방(巨肪)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벼슬은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이르렀다.
 
5)이흥순(李興淳, 1600∼1673)
조선 중기의 지사(志士).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유연(悠然), 호는 운암(雲巖). 색(穡)의 후손이며, 치(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철(遵哲)이고, 아버지는 극함(克諴)이며, 어머니는 최준극(崔峻極)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집의에까지 올랐으나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화친을 청하자,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뒤 1637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명나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며 학문을 닦았다.그 뒤 인조·효종·현종 조에 걸쳐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죽은 뒤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운암일고≫가 있다.
 
6)조평(趙平, 1569∼164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형중 (衡仲), 호는 운학(雲壑). 함안 출생. 아버지는 장령의 증직을 받은 순세(舜歲)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이천(以天)의 딸이다.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였다. 최명룡(崔命龍)과 교우를 맺고 성리학과 예학 (禮學)에 주력하였다.
1624년(인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황산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어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받았다. 1627년 세자익위사세마를 거쳐 사근찰방으로 옮겼으며, 송광유(宋匡裕)의 무고를 받았으나, 곧바로 풀려났다.
그 뒤 제원찰방을 지내고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제원찰방으로 있을 때 군수 김성발(金聲發)과 협력,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순절한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을 수리해 오단(五壇)으로 만들고,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을 봉향하고 제문을 지어 칠백의사의 충혼을 위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초모도유사(招募都有司)로서 의병을 소집하고 군량미를 모아 여산(礪山)의 의병소에 조달하였다. 1639년 고향인 덕치(德峙)에 보(洑)를 쌓고 장장 20리의 수로를 개척, 황무지인 들판 수십만 평을 옥토로 만들어 주민들이 그 공덕을 기려 비를 세웠다.
만년에는 회문산(回文山) 밑에 문덕당(文德堂)과 삼구재(三求齋)를 짓고 심구정(心求正)·우구현(友求賢)·전구경(田求耕)을 좌우명으로 삼아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도학과 문장이 당세에 뛰어났다.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운학문집≫ 9권 3책이 있다.
 
7)김원근(金元根)
호는 취정(翠亭)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그의 생졸 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趙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임실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으로 향민을 교화하였다. 그의 벼슬은 숭정대부 겸경연춘추관(崇政大夫 兼經筵春秋館)에 이르렀다.

1995년 지방지치단체의 지원으로 군비보조와 유림 및 후손들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사우 3칸, 내삼문 3칸이 복원되었다.
원지(院誌) 3책 등 30여 권의 문헌이 있다.
참고-임실군지,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 함박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