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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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중주서원(中洲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
   박 현(朴 鉉) 박강생(朴剛生) 박심문(朴審問) 박중손(朴仲孫) 박 건(朴 楗) 박증영(朴增榮) 박 훈(朴 薰) 박 영(朴 英) 박충원(朴忠元)
   1850년(철종 1)
   
   
   
본 서원이 처음 세워진 연대는 1850년(철종 1)이다. 그 뒤 1869년(고종 5)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듬해 유림이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전라남도 장흥군 세덕사(世德祠)로 9현의 위패를 옮겨 새로 봉안하였으며, 유허지(遺墟址)에는 매단비(埋壇碑)만 남아 있다. 이 서원에는 박현(朴鉉)을 주벽으로 박강생(朴剛生), 박심문(朴審問), 박중손(朴仲孫), 박건(朴楗), 박증영(朴增榮), 박훈(朴薰), 박영(朴英), 박충원(朴忠元)을 배향하였다.

1)주벽-박현(朴鉉)
박현의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2)박강생(朴剛生, 1369∼1422)
고려 말 조선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지(柔之),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 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침(忱)이며, 어머니는 밀산군(密山君) 박린(朴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 2)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08년(태종 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세자에 대하여 보고를 잘 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게 하고 돌아와 태종으로부터 미두(米豆)를 하사받고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2년 앞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있을 때의 부정사건으로 연루되어 태형(笞刑)을 받고 사임하였으며, 1417년 수원부사로 재임중 한양으로 교체되어가는 과천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하여 죽음으로써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1424년(세종 6) 딸이 세종후궁인 귀인박씨(貴人朴氏)가 됨으로써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배불론 俳佛論≫을 지었다.
 
3)박심문(朴審問, 1408∼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할아버지는 침(忱)이고, 아버지는 강생(剛生)이며, 어머니는 윤승경(尹承慶)의 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47년에 평안도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에 도체찰사(道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4)박중손(朴仲孫, 1412∼146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 침(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강생(剛生)이고, 아버지는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절문(切問)이며, 어머니는 왕고(王高)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가 되고,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지병조사(知兵曹事)·동부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아들로 영빈 강씨(令嬪姜氏) 소생인 사위 화의군 영(和義君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 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으나, 이어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 뒤 대사헌, 공조·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 초에 좌찬성에 승진되었고 세 차례에 걸쳐 고시관이 되어 많은 인물을 등용시켰다.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5)박건(朴楗, 1434∼150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계(子啓). 강생(剛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서관정자 절문(切問)이고, 아버지는 정난공신(靖難功臣) 중손(仲孫)이며, 어머니는 공조정랑 문성조(文承祚)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부교리를 비롯한 삼사의 요직을 거쳤다.예종이 즉위하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 한성부우윤, 호조참판을 거쳐, 1472년(성종 3) 진하사부사(進賀使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473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옮겨 공조참판·첨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7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해인사 소장의 대장경 판목을 봉심했고,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관방 시설과 군자 확보에 힘썼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에 부임하자 임금에게 시폐(時弊)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받아들여졌다. 이어 동지중추부사·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을 거쳐 1489년 사헌부대사헌에 재임되었다. 이 때 재이(災異) 방지책 등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492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정조사(正朝使)에 지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회피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강등되었다가, 연산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올랐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어 일처리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에 승진하고 의정부좌참찬에 이어서 우찬성에 올랐다. 그 뒤 좌찬성으로서 지경연사(知經筵事)·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고, 군기시제조(軍器寺提調)가 되어 군기 개선에 노력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반정에 동조해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며,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6)박증영(朴增榮, 1464∼149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별명은 희인(希仁), 호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예조참의 미(楣)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석덕(碩德)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486년 22세의 나이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얻었다. 그 뒤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홍문관교리를 지냈다.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서법(書法)에 능하여 송설체(松雪體)에 특기가 있었다. 1488년 예빈시직장으로 있을 때 허종(許琮)을 따라 명나라 사신 규봉(圭峰)·동월(董越)을 의주의 의순관(義順館)에서 맞이하였다. 이때 동월이 그의 시문과 필법을 보고 감탄하였고, 우아한 성품과 단정함을 기려서 ‘희인(希仁)’이라 이름하였다. 명나라의 부사 왕창(王敞)도 시에는 호연(浩然)의 기상이 있고, 글씨는 당나라 현종간의 천보서법(天寶書法)을 계승하였으며, 원나라 제일의 서예가인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잘 쓴다고 놀라워하였다. 그는 강의(剛毅)·정직의 기질이 있었고, 매우 청렴하여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았다. 청주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눌재유고 訥齋遺稿≫가 있다.
 
7)박훈(朴薰, 1484∼15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 좌찬성 중손(仲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미(楣)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증영(增榮)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6년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다.그러나 어진 이를 임금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감찰로 바뀌었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까지 올라 ‘국기(國器 : 나라에 인재가 될만한 그릇)’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의주로 옮겨졌다가, 13년 뒤에 안악으로 옮겨졌다. 3년 뒤인 1533년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향리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주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효심뿐 아니라 성품과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과 기량이 자연히 이루어져 행동에 지조가 굳고 법도가 있었다.
당대 큰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조광조와는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 :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던 제도) 때 그의 의견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칠 정도였다 한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 ≪강수유고 江叟遺稿≫ 2권 2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8)박영(朴英, 1471∼154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딸이다.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유인숙(柳仁淑)의 모함으로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났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의술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경험방 經驗方≫·≪활인신방 活人新方≫·≪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 등이 있다.
 
9)박충원(朴忠元, 1507∼158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밀양.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조(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찬(襸)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 사국(史局)에 돌아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어 설서·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당후(堂後)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 이조정랑·사간원정언·이조좌랑·헌납·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
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直講)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사성·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좨주(祭酒)로 있다가 해서(海西)를 안무(按撫)하였다.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이어 예조판서·사헌부로서 호남·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1567년(선조 1) 대종백(大宗伯)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儐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奇大升)·이후백(李後白)·이산해(李山海)가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낙촌유고≫가 있다.



<<세덕사의 유래(世德祠의 由來 )>>
1. 세덕사는 원래 전북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에 중주서원[中州書院: 세워진 연대는 1580년(철종 1년)] 있었는데 1869년(고종 5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어 70 여년 제향(祭享)이 중단되었다.
[참고자료: 1996년, 임실의 사적지,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1卷69쪽)]
2. 1938년 장흥(長興)살던 종식(鍾植)님이 임야 4정보와 영모재(永慕齋)를 지어 종중에 헌납하였다.
3. 1948년 위토답 600여평과 영모재(永慕齋)를 세덕사(世德祠)로 개칭(改稱)하고 추가로 10위를 추가 봉안奉安)(하였다.
4. 1971년 장흥군수의 50만특별 보조금과 종인들로 붙어 100만원 표성금을 헌납받아 신실(神室: 세덕사) 을 증축 한 후 규정공 아하 23위 위패 봉안식(位牌 奉安式)을 가졌다.
5. 2006년 4월 15일 현 세덕사 상랑
6. 2006년 월 일 현 세덕사 중건식(重建式)
 
참고-임실군지,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