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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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영천서원(寧川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203-1번지
   안처순(安處順) 정 환(丁 煥) 정 황(丁 熿) 이대빙(李大聘)
   1619년(광해군 11)
   1688년(숙종 12)
   음 3월 5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20호(1948.04.01지정)
영천서원은 1619년(광해군 11) 창건되었으며, 1688년(숙종 12)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에는 안처순(安處順)을 주벽으로 정환(丁煥), 정황(丁熿), 이대빙(李大聘)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 서원은 근처에 있는 30여개 서원 중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권위가 높아 뛰어난 학자들이 멀리서까지 몰려왔다고 한다. 1868년(고종 5)에 철거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후손들이 재건한 것이다.

1)주벽-안처순(安處順, 1492∼15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사재당(思齋堂). 남원 출신. 구(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주부윤 지귀 (知歸)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기(璣)이며,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 능성현령(綾城縣令) 옥산(玉山)의 딸이다.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판서 침(琛)에게 의탁하여 성장하였다. 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정자 겸 경연전경(正字兼經筵典經)·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1517년 홍문관박사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하여 구례현감으로 제수되었다.
이 해 2월 구례현감으로 제수될 때 왕이 불러서 학교를 일으키라고 교시하자, 그는 ≪근사록 近思錄≫을 간행, 보급하여 지방학교 진흥에 노력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이행(李荇)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하고 은퇴하였다가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경성교수(鏡城敎授)를 지내고, 1533년 전적(典籍)으로 제배된 뒤 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이르렀다.
43세에 병을 얻어 남원부 흑성산(黑城山)에 안치됨으로써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성품은 암약(暗弱 : 소극적이고 약함)하여 강직성과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간특하지 않아 사화 때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2)정환(丁煥, 1497∼15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용회(用晦), 호는 회산(檜山). 풍저창부승(豊儲倉副丞) 한우(旱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생서주부 휘(暉)이고, 아버지는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세명(世明)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호조좌랑을 거쳐 1537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540년 경상도도사를 지냈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힘쓰면서 후학의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독실하며 학문이 높아 사림의 영수로 추앙되었다. 뒤에 동생 황(熿)과 함께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회산문집≫ 3권이 있다.
 
3)정황(丁熿, 1512∼156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풍저창부승(豊儲倉副丞) 한우(旱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생서주부 휘(暉)이고, 아버지는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세명(世名)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36년(중종 31)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지평·병조정랑·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44년 정랑으로 있을 때 간관에 의하여 6품미만의 자급(資級)으로 정5품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관작외람(官爵猥濫)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1545년(인종 1) 수렴청정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1546년(명종 1) 검상을 거쳐 사인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尹元衡) 등의 외척이 권세를 잡자 그 일파인 이기(李芑)의 논계로 인하여 파직,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천품이 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1708년(숙종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유헌집≫ 4권 3책과 배소에서 지은 ≪부훤록 負喧錄≫·≪장행통고 壯行通考≫ 각 10여권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4)이대빙(李大聘)
자는 경인(景引)이고, 호는 활계(活溪)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군수 수(洙)의 손자이자 익재 이제현의 후손으로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679년(숙종 5년) 31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는 우계 성혼의 천거에 의해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이 되었다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정암 조광조의 학통을 이어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저서로 ≪활계집≫이 있다.

1)사우(祠宇)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중앙에는 상부가 교창(交窓)형식으로 된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좌우측에는 같은 형식의 두짝 열 개의 봉합문이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되었으며, 공포와 공포사이에는 화반 한 개씩을 놓았다.
 
2)강당(講堂)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가구(架構)형식은 대들보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놓고, 종보를 울린 다음 종마루를 받치고 있는 사다리꼴의 대공을 얹었다.
 
3)기타
전사고는 2칸이며 동서재는 각 3칸, 5칸의 고사, 외삼문 1동이 있다.

유물로는 ≪주서절요 朱書節要≫ 12책 등 100여 권의 문헌이 남아 있다.
참고-임실군지,
전라북도문화재대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전주한옥마을 http://hanok.jeon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