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암서원(華巖書院)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노상리
   이공수(李公遂) 소세량(蘇世良) 소세양(蘇世讓) 이약해(李若海) 소동도(蘇東道) 소영복(蘇永福) 소광진(蘇光震)
   1552년(명종 7)
   
   2월, 8월 중정(中丁)
   
1552년(명종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공수(李公遂)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23년(인조 1) 소세량(蘇世良), 소세양(蘇世讓), 이약해(李若海)를 추가배향하고 1719년(숙종 45) 소동도(蘇東道), 소영복(蘇永福), 소광진(蘇光震)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화암서원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뒤편 로상부락 뒤 미륵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삼간의 사당과 그 옆에 강당삼간(이 강당은 남촌리공수 이십일대손 화영(자자환)께서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붕괴되었음)이 있으나 주위에 대나무 숲이 무성하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서원은 전북원우록에 의하면 사백여년전 조선조 명종칠년 임자 서기일오오이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군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되어 학생정원이 이십여명으로 지방서원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붕괴되어 당시 사당과 강당의 규모는 전혀 알 길이 없어 애석할 뿐이다.
현재 사당은 그 자리에 서기일구칠칠년 일월에 이곳 유림들의 헌금으로 세워졌고 강당은 사당정면에 유적이 있고 지석이 묻혀 있음을 발견 부원계획을 론의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이 서원에는 남촌 이공수를 주벽으로 좌기와 여히 배향하고 있다.
남촌리공수(익산인 일삼○팔~일삼륙륙 려조관지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익산부원군 시문 충공)
곤암소세량(진주인 일사칠륙~일오이팔 관지 대사련)
양곡소세양(진주인 일사팔칠~일오륙이 관지 의정부좌찬)
준암리약해(광주인 일사구륙~일오사륙 관지 예문관직제학 배향하고 있다)
이곳 유림들 주관으로 매년 봄(음이월)과 가을(음팔월) 중정일에 제향하였으나 현재는 재정난으로 봄에만 제향하고 있다.
1869년(고종 6)경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의 전답은 익산향교로 귀속되었다가, 1977년 군내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

1)주벽-이공수(李公遂, 1308∼136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익산(益山). 자는 남촌(南村). 언부전서(讞部典書) 행검(行儉)의 손자이고 감찰규정 애(崖)의 아들이다.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매부인 김공의(金公義) 집에서 자랐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으면서 문과에 급제해 이듬해 전의주부(典儀主簿),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342년에 성균사예·예문응교·지제교, 이듬해에 전교부령(典校副令)·춘추관수찬관에 올랐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서연관(書筵官)이 설치되면서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왕을 시강(侍講)했고, 다음해 지신사(知申事)로서 찬성사(贊成事) 박충좌(朴忠佐)·김영후(金永煦), 참리(參理) 신예(辛裔)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관(提調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1345년 지신사·전리판서, 1347년 밀직부사를 거쳐 이듬해 판밀직사사에 임명되었으며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50년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으며, 공민왕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1352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찬성사에 올랐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해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자 평장사로 죽전(竹田)에 나아가 둔을 쳤으나, 적이 개경을 핍박하자 돌아와서 왕을 따라 남행(南幸)하였다. 이듬해 홍건적이 평정되고, 국왕이 환도하기 이전 참정 황상(黃裳), 추밀원사 김희조(金希祖)와 같이 개경을 지키게 하였다. 그는 재주를 헤아려서 관직을 맡기고 방략(方略)을 지시해 유민을 편안히 안정시키며 생도를 가르치고 길렀다.
1363년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자, 밀직제학 허강(許綱)과 함께 진정표(陳情表)를 가지고 가서 공민왕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로서 그대로 원나라에 머물렀다.
이 해 3월 본국으로부터 좌정승에 임명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덕흥군의 우정승에 임명되었다는 통역관 이득춘(李得春)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364년 원나라 병사 1만 명과 함께 덕흥군을 받들고 귀국하던 최유(崔濡)가 고려의 군사에게 대패한 뒤, 또다시 대병력을 이끌고 귀국하려 하였다.
이 때 홍순(洪淳)·허강·이자송(李子松)·김유(金庾)·황대두(黃大豆)·장자온(張子溫)·임박(林樸) 등과 함께 그 사실을 밀서로 꾸며 정량(鄭良)·송원(宋元)으로 하여금 본국에 보고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득춘의 보고가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져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되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 해 공민왕의 왕위가 회복되자 본국으로 돌아와 국학(國學)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기뻐 원나라 왕에게서 받은 금대(金帶)를 풀어 그 비용에 충당하였다. 이 때 정권을 잡은 신돈(辛旽)이 시기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덕수현(德水縣)의 농장으로 내려가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자칭하고 한가롭게 지냈다.
1365년 익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성품이 깨끗해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주고받지 않았으며, 일에 임할 때는 강하고 의연해 형세에 어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소세량(蘇世良, 1476∼15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중군사정(中軍司正) 희(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며,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좌찬성 세양(世讓)의 형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小說)·불경(佛經)에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글이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臺諫)·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서리들의 기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의 지평·장령, 홍문관의·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1522년 사간·좌부승지(左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24년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였다. 이때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평생 글을 좋아하여 가산은 돌보지 않았으며 효우(孝友)하였고 향리(鄕里)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암집 屛巖集≫ 1권이 있다.
 
3)소세양(蘇世讓, 1486∼156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중군사정(中軍司正) 희(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효식(效軾)이고, 아버지는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이다.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석주(碩珠)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양곡집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4)이약해(李若海, 1498∼154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용(景容), 호는 수암(首巖).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를 거쳐, 1535년(중종 3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녹사가 되고, 1538년 병조좌랑으로 탁영시(擢英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종학교수(宗學敎授)가 되었다. 1543년 선위사(宣尉使)로 일본 사신을 맞아 교역관계를 의논하였고 보덕(輔德)을 거쳐 1545년(인종 1) 전한(典翰)으로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을 거쳐, 직제학에 올랐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 나주목사로 체직되었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尹任)의 일파로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추대에 가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 관직된 뒤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원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고 가사전토(家舍田土)가 모두 소윤일파에 분급되었다.
그 뒤 1550년 대간에 의한 신원운동(伸寃運動 : 죄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운동)과 1568년(선조 1) 삼공(三公)에 의한 계청으로 신원되어 직첩과 가산을 되돌려 받았다. 전라북도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5)소동도(蘇東道, 1592∼16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 전라북도 익산 출신. 첨사 세공(世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건(建)이고, 아버지는 찰방 만선(萬善)이다. 1617년(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는 벼슬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163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된 뒤 1646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 면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 은산부사를 지내고 정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암행어사로서 민정과 수령의 치적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50년(효종 1) 의주부윤이 되어 호란 후 피폐하여진 민생을 구제하고 국방과 영선사업에 힘썼다. 뒤에 경주부윤을 거쳐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수령전최(守令殿最 : 근무 성적의 평가)에 공정을 기하였다. 익산지방의 대표적인 명문출신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몸소 실천하였으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6)소영복(蘇永福, 155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수(重綏), 호는 사은(四隱). 익산 출신. 대사간 세량(世良)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민선(敏善)이다. 서윤(庶尹) 응선(膺善)에게 입양되었다. 김은휘(金殷輝)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成渾)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번 권유받았으나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龍華山)에 작은 성을 쌓아 향토 방위에 참여했으며, 난 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 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1605년 김장생(金長生)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典籍)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 리에 달하는 수로 건설을 건의, 농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복(醫卜)·병법(兵法)·관방(關防)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했으며, 성혼에게 종유(從遊 ; 좇아 사귐.)하는 한편, 조헌(趙憲)·정경세(鄭經世)·한백겸(韓百謙)·황신(黃愼) 등과의 친교가 두터웠다.
광해군 때 조카 명국(鳴國)이 대북·소북간의 당쟁에 관여, 몰락하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
 
7)소광진(蘇光震, 1566∼16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실(子實), 호는 후천(后泉). 대제학 세양(世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迂)이고, 아버지는 찬성 성선(誠善)이다. 1589년 (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9년에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었다. 1601년 승정원주서·예문관검열·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좌랑을 거쳐 1603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이어 병조정랑이 되어 지제교(知製敎)·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도사·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며, 1607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고,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시강원필선을 거쳐, 1611년에 홍문관교리·사간원헌납을 역임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3칸의 강당과 3칸의 내삼문이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주한옥마을 http://hanok.jeon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