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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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보광서원(葆光書院)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이언복(李彦福) 육대춘(陸大春) 이지성(李至誠) 이지도(李至誠) 양몽열(梁夢說) 김준업(金峻業) 유 정(柳 頲) 이후태(李后泰)
   1720년(숙종 46)
   
   
   
이 사우는 1720년(숙종 46)에 창건되었으나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하였던 것을 1971년 복원한 것이다. 현재 이 사우에는 이언복(李彦福)을 주벽으로 하여 육대춘(陸大春), 이지성(李至誠), 이지도(李至誠), 양몽설(梁夢說), 김준업(金峻業), 유정(柳頲), 이후태(李后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주벽-이언복(李彦福)
이언복은 호를 모암(慕菴)이라 하였고, 벼슬은 장악정(掌樂正)에 이르렀다. 그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현재 보광사가 있는 곳에서 후학들의 교육에 힘썼다.
 
2)육대춘(陸大春)
육대춘은 호를 경암(敬菴)이라 하였고 광양현감을 역임하였다.
 
3)이지성(李至誠)
호를 연독재(聯獨齋)라 하였으며, 이언복의 아들이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4)이지도(李至道)
호를 이락당(二樂堂)이라 하였으며, 이언복의 아들로 지성의 아우이다. 그는 성혼의 문인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그 뒤 흥학당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정철과 친교하였다.
 
5)양몽열(梁夢說)
자는 천뢰(天賚)이며 호는 도계(陶溪)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 권유(權有)의 후손이며 참의(參議)로 중직된 국걸(國傑)의 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환 중에 있을 때 극진히 돌보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어릴 때 정여립(鄭汝立)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가 발길을 끊자 정여립이 “같은 고향에서 살면서 그럴 수 있느냐”고 꾸짖었다. 뒤에 정여립이 모반하다가 참살을 당하니 사람들이 그의 선견(先見)에 탄복했다.
1597년(선조 30)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그 해 가을에 소모사(召募使) 이정란(李廷鸞)이 성을 지키며, 그에게 호(濠)를 파고 성을 수축케하니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전주부윤(全州府尹) 박경신(朴慶新)이 도주하자 그는 분한(憤恨)을 간직한 채 낙향했다. 뒤에 어머니를 모시고 상주로 피난을 가는데 왜적이 나타나 앞을 가로 막았다. 그의 어머니가 오욕(汚辱)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자결하자 그는 관(棺)을 지고 돌아와 장사지냈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내의 동지들과 함께 병사와 군량을 모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생(儒生) 백여명과 함께 왕세자를 공주(公州)에서 맞이했다. 뒤에 보광사(葆光祠)에 배향되었다.
 
6)김준업(金峻業,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여수(汝修). 호는 동계(東溪). 전주 출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항소(抗疏)하여 그 그릇됨을 극언하고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 후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고 난이 평정된 뒤에 남은 곡식을 모두 국가에 반납하였다.
또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로 행재소(行在所)에 나갔고,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와 항쟁하였다. 최명룡(崔命龍)·김동준(金東準) 등과 강학하여 삼현(三賢)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전주 보광사(葆光祠)에 향사되었다.
 
7)유정(柳頲, 1609∼168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오무당(五無堂). 아버지는 부사 신로(莘老)이며, 어머니는 진주임씨(晉州任氏)로 군자감참봉 경창(慶昌)의 딸이다. 유년시절에 아버지에게 수학하였다.
1638년(인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40년 성균관학유로 벼슬을 시작하여 형조·예조·이조의 좌랑 및 춘추관·세자시강원의 여러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 외임(外任)으로 나가 부안·순천·안악·무안 등지의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1669년(현종 10) 무안현감으로 있던 중 사건에 연루되어 은진에 도배(徒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75년(숙종 1)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1680년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기용되었고, 그 뒤 사헌부지평·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홍남립(洪南立)·목행선(睦行善)·조복양(趙復陽)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유충옥(柳忠玉)·송징(宋徵)·이태동(李泰東) 등이 있다.
 
 
8)이후태(李后泰)
호를 유계(游溪)라 하였으며 송준길의 문인으로 예학에 밝았다.

사당 보광사(葆光祠와) 강당, 부속건물 1 동과 내.외문, 비석 1기가 있다. 보광서원 입구에는 ‘보광서원(葆光書院)’ 현판이 걸려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완주군지1996,
전북향교원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