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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국유(鞠襦) 고려말 의절인으로 자는 경덕(敬德), 호는 복애(伏崖), 본관은 담양 양(樑)의 아들로 1324년(충숙왕11)에 추성현(秋城縣) 원율리(原栗里)에서 출생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門人)이다. 벼슬은 호부상서겸판의금(戶部尙書兼判義禁)에 이르렀다. 전록생(田祿生)ㆍ정몽주(鄭夢周)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부통사(副統使)로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과 더불어 탐라(耽羅)를 정벌(征伐)하여 제주(濟州)라 했고, 그 공으로 호부상서겸 판의금부사(戶部尙書兼判義禁府事)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자정(自靖)하니 태조(太祖)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불렀으나 응(應)하지 않았다. 태조(太祖)가 진로(震怒)하여 그 여막(廬幕)에 불을 지르게 하니 피하지 않고 소신(燒身)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개성 표절사(表節祠)와 담양 귀산사(龜山祠), 장성 경현사(景賢祠), 담양 증암사(甑岩祠)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2)국함(鞠涵)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양원(養源)이고, 호는 환성(喚醒)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수성(守成)의 아들로 1573년(선조6) 출생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門人)이다. 송표옹(宋瓢翁), 정화곡(鄭禾谷), 심초정(沈草亭), 구죽유(具竹牖), 이서귀(李西歸)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여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았다. 문기(文氣)가 정한(精悍)하고 필세(筆勢)가 출중(出衆)하였다. 1613년(광해5)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혼조(昏朝)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자적(杜門自適)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다 세상을 떠났다. 3)국침(鞠沈)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심원(深源)이고, 호는 송만(宋灣)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함(涵)의 아우로 1577년(선조 6) 출생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門人)이다. 송표옹(宋瓢翁)ㆍ정화곡(鄭禾谷)ㆍ심초정(沈草亭)ㆍ구죽유(具竹牖)ㆍ이서귀(李西歸)등과 종유(從遊)하였다. 부병(父病)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묘(廬墓)를 3년하였다. 이 효행이 알려져1650년(효종1)에 정려(旌閭)와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1613년(광해5)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후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취련산(翠蓮山) 기슭에 집을 짓고 형제들과 더불어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餘生)을 마쳤다. 4)국명(鞠溟)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거원(巨源)이고, 호는 죽계(竹溪)며, 본관은 담양이다. 함(涵)의 아우로 1583년(선조16)에 출생하였으며,정우복(鄭愚伏)의 문인(門人)이다. 심초정(沈草亭)ㆍ구죽유(具竹牖)ㆍ구우교(具于郊)ㆍ이서귀(李西歸) 등과 종유(從遊)하였다.문장(文章)으로 이름 있었으나 혼조(昏朝)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죽계(竹溪) 옆에 집을 짓고 학문(學問)에 열중하여 크게 성취(成就)하였다. 이후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진력하다 일생(一生)을 마쳤다. 축문(祝文): 환성국선생(喚醒鞠先生) 송만국선생(松灣鞠先生) 죽계국선생(竹溪鞠先生) 복이(伏以) 일문효우(一門孝友) 병세문장(幷世文章) 유모재인(遺慕在人) 유엄시당(有儼是堂) 자용중정(玆用中丁) 식천두상(式薦豆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