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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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호서원(龜湖書院)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구미리 510
   박상충(朴尙衷) 이성중(李誠中) 박 은(朴 訔) 송유저(宋有著) 임사수(林士壽) 박 소(朴 紹) 박종설(朴宗設) 박치우(朴治愚) 유기섭(柳基燮)
   1730년(영조 6)
   
   2월, 8월 중해(中亥 : 두번째 亥日)
   
이 서원은 1730년(영조 6)에 처음 세워졌다. 1777년(정조 원년)에 이곳에 처음 모셔왔던 박상충(朴尙衷), 이성중(李誠中), 박은(朴訔), 송유저(宋有著), 임사수(林士壽), 박소(朴紹) 등 5명의 신위를 없앴다가 1798년(정조 22) 이들의 신위를 다시 봉안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건물까지 모두 철거하였다가 1904년(광무 8) 이름을 구호단(龜湖壇)으로 개칭하여 박종설(朴宗設), 박치우(朴治愚), 유기섭(柳基燮) 등 세 사람의 신위를 추가로 배향하게 되었다. 1970년에 이르러 사당을 중건하고 구호서원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주벽-박상충(朴尙衷, 1332∼137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수(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 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 : 제사의 禮典)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다. 이 때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 해 간관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田祿生)·정몽주·김구용·이숭인·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던 도중 별세하였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항상 삼갔으며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이성중(李誠中, 1330∼141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고려 말 문과 출신으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축성도감제조(築城都監提調)로 있을 때 축성한 것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옥되었다.
그 뒤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른 뒤,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거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3)박은(朴訔, 1370∼142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고려 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상충(尙衷)이며, 어머니는 이곡(李穀)의 딸이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사위이며, 어효첨(魚孝瞻)의 장인이다.
문음(門蔭)으로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를 받은 뒤, 1385년(우왕 11) 문과에 2위로 급제해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후덕부승(厚德府丞)을 거쳐 1391년(공양왕 3)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듬해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 고과(考課)에 정최(政最)의 성적을 받아 좌보궐(左補闕)에 임용되었다. 1394년(태조3)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있을 때 태조의 다섯 째 아들 방원(芳遠)에게 충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1397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이듬해 발생한 무인정사(戊寅靖社), 즉 제1차 왕자의 난 때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방원의 집권을 위해 지방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어 사헌중승(司憲中丞)·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을 때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역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방원이 왕세자가 된 1400년에는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그를 보필하였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오른 뒤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조·호조·병조·이조의 4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 : 뒤에 潘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한성부윤·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을 역임하고, 1406년(태종 6)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예의로 잘 접대해 칭송을 받았다. 이듬해 진향사(進香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에 옮겼다가 1409년에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평양성 축성을 마쳤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자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으며,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어 옥무(獄務)에서 신장(訊杖)의 사용 횟수를 1차 30인으로 정해 합리적인 형정 제도를 시행하였다. 1414년 이조판서 때에는 고공(考功)의 행정 제도를 개선하였다.
1416년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입각(少年入閣)의 예에 들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올랐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沈溫)과 대립해,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의 옥사 때에는 심온의 반대 입장에서 관여했다는 세평을 듣고 있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문과 초시에서 강경(講經)을 채택하도록 강력히 주장해 시행하도록 했으니, 초시에 제술(製述)을 주장하는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과는 학통이 다르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4)송유저(宋有著)
호를 운곡(雲谷)이라 하였다. 그는 고려 공민왕 초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문하시중 보문각 대제학(門下侍中 寶文閣 大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이 곳 완주로 낙향하여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채 울분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뒤에 그에게 인의군(仁義君)이 봉해졌다.
 
5)임사수(林士壽)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 문종 원년(1450)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가 단종 2년(1454)에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의 벼슬을 하였다.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자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완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6)박소(朴紹, 1493∼15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 : 강의나 강론하는 자리)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다.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그 뒤 정언(正言)·지평(持平)·사인(舍人)·필선(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7)박종설(朴宗設)
호를 창백(蒼伯)이라 하였다. 그는 송시열의 5대손 송환기(宋煥箕)에게서 성리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성리철학 특히≪주역≫과 예학에 능통하였으며 시(詩)를 잘 지었다고 한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후학들을 모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8)박치우(朴治愚)
자는 덕일(德一)이며 호는 종호재(從好齋)라 하였다. 그는 정조 9년(1785)에 태어났다. 유교의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며 많은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9)유기섭(柳基燮)
자는 상경(相慶)이며 호를 추채(秋齋)라 하였다. 그는 정조 21년(1797)에 태어나 박종설에게서 성리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특히 효행이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뛰어난 효행으로 국왕으로부터 정려를 은전받았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백산재(柏山齋), 내신문(內神門), 모현문(慕賢門), 협문(夾門), 입덕문(入德門)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박상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박은, 임사수, 박종열, 유기섭, 왼쪽에는 이성중, 성유저, 박소, 임치우의 순으로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백산재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에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을 토론하는 곳이다.
유물로는 50여권의 문헌이 있으며 매년 2월 중해(中亥 : 두번째 亥日)와 8월 중해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완주군지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