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백산서원(栢山書院)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167 북리마을
   하 연(河 演) 하징도(河徵道) 하정도(河呈道) 하형도(河亨道) 하현도(河顯道)
   1821년(순조 21)
   1821년(순조 21)
   3월 9월 초정(初丁)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60호(2000.06.23지정) 문효공과 정경부인영정-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81호 (1977.12.31지정)
1821년(순조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하연(河演)의 선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타진사(妥眞祠)로 사액되었고, 하연과 그의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영정을 봉안하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고종 6년(1869)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5년 유림과 후손에 의해 복원되고 하위국(河衛國)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무주군 안성면 죽양리 죽계서원(竹溪書院)에서 훼철된 하징도(河徵道)·하정도(河呈道)·하형도(河亨道)·하현도(河顯道) 등 4현(四賢)의 위패를 봉안하고자 백산사(柏山祠)를 창건하고 구액(舊額) 백산서원을 게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은 하연(河演)을 주벽으로 하여 유성룡의 문인으로 당시 효행이 지극하고 성리학자로 알려진 하징도(河徵道)와 하정도(河呈道), 하형도(河亨道), 하현도(河顯道)를 배향하고 있다.
 
고려시대 이래로 향리의 중심 층인 ‘기관’이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서원으로 개칭되었으나 중앙 각 관아의 서원은 1499년(세조) 1월 단행한 관제개혁에 수반되어 상급 서리는 녹하로, 하급 서리는 서리로 각각 단일화하는 조치로 소멸되었으며, 다만 지방 각 관아의 서원은 한말까지 지속되었다. 
중앙의 서원은 서리가 없는 병조, 형조, 승정원, 교서관 등에 배속되어 잡역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문서작성, 열자, 외계, 공사전달 등의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지방의 서원은 부, 대도호부, 목, 군, 현 등지에 배속되어 수령과 육방아전의 지시를 받아, 세금징수, 손실답험 등의 행정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지방의 양인 가운데서 충부, 목은 30명, 도호부는 26명, 군은 22명, 현은 18명으로 명문화되어 한말까지 이어졌다.
지방의 서원은 중앙의 서원과는 달리 산계, 상급 서리 배속 등과는 유리되어 천인 시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세금징수, 손실답험사를 수행하면서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다. 

백산 서원은 무풍면 현내리 북리마을에 소재하며 고려우왕(1376년)~ 조선 단종(1453년)사이의 인물인 문효공 경재 하연선생과 정경부인 성산 이씨의 영정이 타진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원래 1본밖에 없었던 것인데 본 군의 영정을 화첩 본으로 삼아 후손들이 이모 하여 분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인 성산 이씨의 영정은 조선초기 여인들의 복식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이다. 

문효공 하연선생은 조선 개국을 반대하여 두문동에 숨어살던 고려 유신 중의 한사람인 하자종의 아들로서 9세 때 백이전을 읽다가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었다는 데에 이르러 백형에게 말하기를 “수양산은 곧 주나라 땅이요, 고사리 또한 주나라 산물인데 어찌 주나라 땅에 숨어살면서 주나라 산물을 먹는가” 하여 매우 기이하게 여기서 목은 이색이 듣고 “이는 압록강 이동의 인재
일 뿐만 아니다 비록 송나라 전성시대에도 이보다 나은 인재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비범하셨으며, 정몽주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 포은 정몽주 선생이 “그대가 남으로 가면 우리도가 남으로 간 것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학식이 높은 분이셨다. 

선생이 전라감사에서 승진하여 부름을 받으니 선비와 백성들이 수레의 멍에를 붙잡고 토석으로 길을 막아 언덕을 이루었으며 황희 정승과 허조로부터 재상을 물려받았으며, 삼정승을 두루 거친 세종 때의 충신이었다.
78세 때 병을 앓고 있을 때 왕이 친히 찾아와 국사를 자문했으며, 선생의 병을 걱정하셨고, 선생의 부음소식을 들은 임금께서는 슬퍼하면서 3일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고 부의와 재물을 내리며 관리들에게 관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하였다. 
백산서원 앞에는 정승나무가 있는데 관리하는 사람에 의하면 조선시대 정승 벼슬을 하던 집안에만 심게 하던 나무라 하나 역사를 다듬어 보면 정승 댁에는 백송을 심어 기면했다는 기록이 있다. 추측컨대 경재하연 선생이 삼정승을 지내셨기 때문에 기념하기 위해 3그루를 심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타진사 옆에 백산사에는 진양 하씨 문중의 선대인 하위국의 아들 네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 네분의 하선생은 하징도, 하정도, 하형동, 하현도로서 하징도는 하위국의 장자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논어, 맹자, 중용, 효경 등을 통달했던 신동으로 성리학을 깊이 탐구했다. 
하정도는 둘째아들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했다. 옥구현감에 제수 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지례현감에 제수 했으나 친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고 예도를 벗어나며 효행을 다했다. 
하형도는 셋째아들로 천성이 착하고 경학을 좋아했다. 생전에 부모 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상중에는 3년간 시묘하며 여막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밤마다 호랑이가 지켜주었다 한다.
하현도는 넷째 아들로 평소 도의를 가까이 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백운산의 양지바른 곳에다 모정을 세우고 선비들과 경사를 풀며 도의를 닦았다.

1)주벽-하연(河演, 1376∼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즙(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윤원(允源)이고, 아버지는 부윤 자종(自宗)이며, 어머니는 정우(鄭寓)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했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1437년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공세법(貢稅法 : 연분9등, 전분6등)을 마련했으며, 1442년에는 각품의 행수법(行守法)을 제정하였다.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진양연고 晉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하징도(河徵道)
조선중기의 이름난 효자이다. 호는 수용(睡慵), 본관은 진주, 하연의 후예(後裔)이며 유성룡의 문인이다. 천품이 영지(頴持)하여 5세에 六甲을 외우고 10세 때 四書에 통했다. 성리학에 전심하여 학문이 깊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친병에 노심초사하여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한다.
 
3)하정도(河呈道)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호는 서악, 본관은 진주, 연의 후예이며 유성룡의 문인이다. 천품이 영지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575년(선조 8) 하마에 들고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春秋館記事官兼經筳事를 지냈고 지례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친상을 당하여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좋아하던 일을 글로 써 ‘永慕錄’이라 하여 冊으로 엮었다.
 
4)하형도(河亨道)
조선 중기 효자, 호는 취은(醉隱), 본관은 진주, 연의 후예이며 유성룡의 문인이다. 천품이 영지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상에 3년 여묘(廬墓)하였는데 흰제비가 날아와 문상하고 호랑이가 호위(護衛)하였다 한다. 어느 날 밤에는 호랑이가 오지 않았는데 꿈에 호랑이가 영동 초강의 물에 빠져 구조를 요청하였다.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30냥의 돈으로 사람을 사서 호랑이를 구출하여 놓아주니 다음 날로 다시 나타났다 한다.
 
5)하현도(河顯道)
조선 중기 학자, 호는 모정(茅亭), 본관은 진주 연의 후예이며 유성룡의 문인이다. 학문이 깊고 효성이 극진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4형제가 부모를 동굴에 피신시키고 극진히 봉양하여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정온(鄭蘊)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타진사(妥眞祠), 3칸의 백산사(柏山祠), 4칸의 강당, 내신문(內神門), 협문, 4칸의 고사(雇舍), 3칸의 행랑(行廊), 대문 등이 있다. 타진사에는 하연 부부의 위패와 영정이 주벽(主壁)으로 봉안되어 있고, 동벽(東壁)에 하위국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문효공과 정경부인영정-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81호(1977.12.31지정)
무풍면 현내리 소재, 백산서원(柏山書院) 타진사(妥眞祠)에 봉안된 영정(影幀)으로 조선 세종 때의 명신(名臣) 하연(河演. 1376∼1453)과 그의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초상화이다. 백산서원 타진사에 영정이 모셔진 것은 순조 21년(1821) 백산영당(柏山影堂)을 건립하고, 고종 6년(1869) 철폐된 후 타진사를 세울 때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영정 중 성산이씨의 초상은 백산서원 외에도 경남 합천(陜川)의 타진당(妥眞堂)과 충북 청원(淸原)의 우록영당(友鹿影堂)에도 1본씩 봉안되어 있다. 어떤 경로인지 모르나 일본(日本) 천리대(天理大) 도서관에 가로 35㎝, 세로 50.1㎝ 크기의 견본으로 채색된 정경부인의 초상화 부본(副本)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본래 영정은 아들인 하우명이 수사(手寫)해 두었는데, 사후에 하연의 묘 근처에 영당을 지어 함께 봉안하였고, 후에 합천 야로(冶爐)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인조 18년(1640) 영남관찰사로 있던 하연의 외가(外家)쪽 후손인 구봉서(具鳳瑞)가 합천 타진당의 유상(遺像)을 봉심(奉審)하였는데, 영정의 채색이 너무 심하게 벗겨져 고쳐 그렸다고 한다. 본래 영정은 1본뿐이었는데, 백산서원에 모셔진 영정을 화첩본(畵帖本)으로 삼아 후손들이 옮겨 그려 나누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하연문집 河演文集≫ 3책 등 50여종의 문헌
참고-무주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라북도지
전북향교원우대관1994
 
※무주군지에는 복구년도가 1908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905년으로 서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