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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황희(黃喜, 1363∼145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67년 음보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에 합격, 1389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1394년 성균관 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임, 그 후 직예문 춘추관 사헌감찰, 우습유, 경원교수, 경기도 도사를 역임했다. 정종 2년(1400)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정랑을 거쳐 태종 4년(1404) 우사간대부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지신사에 올랐으며, 이 후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408년 민무휼 등 왕의 처족이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거했고,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태종16년(1416) 이조판서로 세자의 폐출을 반대하다 공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1418년에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 서인이 되어 교하로 유배, 이어 남원에 이배되었다. 세종 4년(1422)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예조판서, 강원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 1427년 좌의정에 올라 사부를 겸했으나 1430년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라 이후 1449년 치사할 때까지 18년간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 받는 재상으로서 왕을 보좌했다. 시조 몇 수가 전하며,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신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2)오상덕(吳尙德) 아호는 두암, 여말의 대학자로 이색 정몽주 등과 교우였으며, 억불숭유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황희의 매형이며, 소부사 소감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게 되자 당시 고려를 지탱하고자 하는 유신(遺臣)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3)황위(黃暐, 1605∼165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 증 좌의정 윤공(允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청도병마절도사 진(進)이고, 아버지는 정열(廷說)이며, 어머니는 김극수(金克修)의 딸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창의, 의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향하여 올라오다가 과천에서 적군을 만나 싸워 승전하였다. 청나라와 화친이 맺어지자, 군사들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638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정언이 되었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에 앞장섰던 김상헌(金尙憲)이 주화론자(主和論者)들로부터 배척당함을 보고 상소, 구제하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 효종 즉위와 함께 다시 등용되어 함경도도사·평양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