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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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정충서원(旌忠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 산7번지
   황 진(黃 進) 고득뢰(高得賚) 안 영(安 瑛)
   1649년(인조 27)
   
   (음력)10월 12일
   
정충사(旌忠祠)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한 황진(黃進)과 고득뢰(高得賚), 그리고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안영(安瑛) 세 충신을 위해 1649년(인조 27)에 건립하였으나 사우는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다.

1)주벽-황진(黃進, 1550∼159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희(喜)의 5대손이며, 지중추부사 사효(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직 개(塏)이고, 아버지는 증좌의정 윤공(允恭)이며, 어머니는 방씨(房氏)로 봉사 응성(應星)의 딸이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거산도찰방에 기용되고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을 역임하였다. 이어 다시 선전관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일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를 거쳐, 동복현감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해 무예의 단련에 열중하였다.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황윤길의 예상과 뜻을 같이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용인에서 왜군과 대적했으나 패하였다. 이 후 남하하다가 진안에 침입한 왜적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훈련원판관으로 이현전투(梨峴戰鬪)에 참가해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익산군수로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였다.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陣)을 안성으로 옮겼다. 여기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해 죽산성에 있는 적과 대치하였다. 이 때 적장 후쿠시마(福島正則)가 안산성을 탈취하고자 죽산부성(竹山府城)을 나와 안성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왜군에 접전해 죽산성을 점령했으며,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해 대파하였다. 그 뒤 6월 적의 대군이 진주를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성을 굳게 지키며 9일간이나 용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2)고득뢰(高得賚, ?∼159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용담(龍潭). 자는 은보(殷甫). 아버지는 효륜(孝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경서와 글씨에 뛰어났다.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고, 어란만호(於蘭萬戶)와 방답첨절제사(防踏僉節制使)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상을 당하여 고향인 남원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휘하의 부장이 되어 장수·무주·금산 등지에서 왜병과 맞서 싸웠다. 그 공로로 평창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마중 나온 향리들이 평창은 외진 곳으로 난을 피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역설하였으나, 나라가 위급하므로 편안함을 취하지 않겠다고 거절하고 의병의 부장으로 계속 왜적과 싸웠다.
진주성이 위급하자 최경회와 함께 성에 들어가 다른 의병과 협력하여 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다. 뒤에 한성부우윤에 추증되었다.
3)안영(安瑛, ?∼1592)
조선 중기의 열사.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서(元瑞). 남원 출신. 교리(校理) 처순(處順)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니, 옥과(玉果)의 유팽로(柳彭老)가 호응하여 모여든 의병 6,000여명을 거느리고 전주를 지나 여산(礪山)에 머물렀다.
적을 멸하고 서울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충효를 다하려고 양대박(梁大樸)과 더불어 고경명 휘하에 들어갔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거느리고 금강까지 왔다가 갑자기 회군하였으나 고경명은 계속 북진하고 아들 종후(從厚)와 의논하여 은진(恩津)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였는데, 적이 금산에 이미 들어갔음을 듣고 금산성 밖 와은평(臥隱坪)에 진을 쳤다.
적은 관군이 취약함을 알고 먼저 관군을 향하여 진격하니 영암군수 김성헌(金成憲)이 도망하고 전군이 흩어지자 적은 고경명군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다.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국 싸움에 패하여 전군이 흩어졌다. 그가 고경명에게 후퇴하여 후일에 재건할 것을 종용하자, 고경명은 내가 마땅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니 군(君)은 속히 자리를 떠나라 대답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억지로 고경명을 말에 태웠으나 기마에 서투른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져 말을 놓치자 자기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도보로 뒤를 따랐다. 적병이 핍박하자 유팽로와 더불어 대장 고경명을 몸으로써 막고 적과 싸우다 고경명과 그의 아들 종후, 유팽로와 함께 순국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옛 건물이 있던 자리를 확대하여 복원한 것들이 정충사가 섰던 자리 옆에는 황진의 신도비가 서 있으며 후면의 언덕 위에는 황진의 묘가 있다. 그리고 사우의 동남쪽에는 재실이 있어서 현재도 음력 10월 12일의 시제 때에는 후손들이 모여서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재실은 정면 5칸, 측면 반 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에는 양기와를 덮었다. 기둥은 전면의 4개는 두리기둥이나 나머지는 방주이다.
1)황진의 신도비
 
2)황진의 묘
참고-남원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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