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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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호서원(龍湖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723
   주 희(朱 熹) 송병선(宋秉璿) 김재홍(金在洪) 김종가(金種嘉)
   고려시대
   
   (음력) 3월 15일
   
용호서원은 서원 시설로 경양사(景陽祠) 등의 사당을 건립하여 처음에는 중국의 주자(朱子)를 배향하였고, 주로 지역의 향촌 중등교육을 담당하였다. 이후 중국의 성현 주자에서 남원의 충절 선비인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영송 김재홍(嶺松 金在洪), 입헌 김종가로 배향의 대상이 변하면서 주자의 영정은 현재 보관 형태로 관리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김종가가 1927년 용호서원을 설립하면서 시설을 확충하고 경양사와 작은 강당을 짓고서 후학을 지도하면서부터 현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용호서원은 설립 당시 원동향약계에 소속된 지역 유림 선비들의 참여에 그 근간을 두고 있었다. 「원동향약」은 남원도호부 관내에서1572년(선조 5)에 설립하여 42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채 현재까지 존속, 계승되고 있다.
유림 선비들의 향촌 자치 규약인 남원 「원동향약」은 현재 허영욱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관련 문집으로는 1638년(인조 16)에 작성한

1)주벽-주희(朱熹, 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정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2)송병선(宋秉璿, 1836∼1905)
조선 말기의 문인·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면수(勉洙)의 장자로,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하는 틈틈이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 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 近思續錄≫이라 하였다.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 請討凶賊疏>를 올렸다.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53권의 ≪연재집 淵齋集≫과 ≪근사속록 近思續錄≫, ≪패동연원록 浿東淵源錄≫, ≪무계만집 武溪謾輯≫, ≪동감강목 東鑑綱目≫ 등이 있다.
 
3)김재홍(金在洪)
호는 영송(嶺松)이며, 1927년 용호서원을 세웠으며, 일제치하 후학양성에 힘썼다.
 
4)김종가(金種嘉)
호는 입헌(立軒)이며, 1927년 용호서원 건립에 참여하고 일제치하에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현재 용호서원 또는 용호정사(龍湖精舍)내에는 솟을삼문의 대문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태의 경양사와 서재시설인 목간당, 수성재가 자리하고 있다.
사우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양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중앙의 칸에는 두짝의 세살문이 있으며 좌우 측칸에는 외짝문을 달았다. 가구 형식은 매우 간단하다. 대공이 없이 들보가 직접 종마루를 받고 있다. 이곳에는 주자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다.
특히 용호서원의 서재로서 주자의 목판 글씨체로 만든 편액이 걸려 있는 목간당(木澗堂)과 수성재(須成齋)가 용호서원 내에 현존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암 송시열의 주련 글씨 “永棄人間事 吾道付滄洲(영기인간사 오도부창주: 영원히 인간을 버리고 나면 나의 도가 은인이 사는 곳과 부합된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주자영정
설립 당시 봉안되었던 주자 영정은 1555년(명종 10)에 광주(光州)에 사는 유림 선비 박광옥(朴光玉)이 명나라에 서장관 신분으로 파견되었을 때, 중국의 주자와 여대균의 영정을 들여와서 남원부 원천방의 풍천노씨 집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용호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주자 영정은 1893년(고종 30) 남원 고을의 여론에 따라 남원부 성내 남원향교 관할의 양사재(養士齋) 경내의 인산영당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현재 주자 영정은 2003년 즈음에 다시 주천면 호경리 마을로 되돌아와 보관되고 있다.
참고-남원지,1992
두산백과사전
디지털남원문화대전 http://namwon.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