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장서원(龍章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644
   양능양(梁能讓) 양주운(梁朱雲) 김용구(金九容) 양대박(梁大樸)
   1302년(충렬왕 28) 용성사1402년(태종 2) 서원개칭
   
   (음력)3월 17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3호(1984.04.01지정)
이 서원은 고려 충렬왕 28년(1302)에 현 남원시 수지면 산정리에 창건되었는데 그 때는 용성사(龍城祠)라 하였다. 그 후 조선 태종 2년(1402)에 용장서원이라 개칭하였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불탄 것을 정조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중건하였다. 조선조 정조 때에 현 위치에 중건하면서 용장서원이라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양능양(梁能讓)을 주벽으로 하여 양주운(梁朱雲), 김용구(金九容), 양대박(梁大樸)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주벽-양능양(梁能讓)
아호를 수암(遂庵)이라 하였으며 고려 성종 때 병부랑중을 역임하였다. 그는 목종 때 김치양 일파의 전횡과 불의에 의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남원 중산동에 은거한 후 세상을 떠났다.
 
2)양주운(梁朱雲)
고려 원종 때 벼슬이 정당문학에 올랐던 사람으로 삼별초를 평정한 공으로 찬화공신에 녹훈되고 용성군에 봉해져 남원부를 식읍으로 받았다.
 
3)김용구(金九容, 1338~1384)
호를 척약재(惕若齋)라 하였고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여말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가 되었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벼슬은 병부의장 겸 성균관 직강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정몽주 등과 정주학을 일으켜 척불앙유의 선봉이 되었다. 그 뒤 판전교시사를 지낸 바 있으며 친명파에 속하여 당시 여명과의 얽힌 외교문제를 해결하고자 행례사로 가던 도중 요동에서 친원파에 붙들려 명에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문집이 있다.
 
4)양대박(梁大樸, 1544∼1592)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1592년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관(學官)으로서 아들 경우(敬遇)와 가동(家僮)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幼學)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달 7일 군대를 정비하고, 이튿날 출정에 나서자 그는 전주로 가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다.이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1786년(정조 10) 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병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1796년 9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로 개증(改贈)되었다. 저서로는 ≪청계집(靑溪集)≫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서원의 건물은 사당을 비롯하여 내삼각, 제각, 외삼문 등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처마는 전후가 모두 겹처마이다. 기둥은 도리기둥이며, 양쪽 박공 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지붕에는 양기와를 얹었다. 정면의 3칸은 기둥 사이를 모두 동일한 간격으로 분할하고 각각 두 짝 열 개의 교살문을 달았다. 정면 중앙 문 창방 위에는 숭덕사(崇德祠)라 쓴 현판이 있다. 이 사당은 돌담장으로 둘려 있으며, 사당 정면 중앙에 내삼문을 내었는데 평상문이고, 지붕에는 양기와를 덮었다. 내삼문의 기둥은 두기기둥을 사용하였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전면의 것은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방주이다. 지붕에는 양기와를 덮었다. 평면은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가각 1칸 반씩의 방을 배치하였다. 강당 앞뜰에는 1962년에 세운 기적비가 있다.외삼문은 솟을대문이며, 중앙의 문 위에 용장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참고-남원지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