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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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학당서원(學堂書院)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학정리 생건마을
   안 처(安 處) 정 담(鄭 湛) 안경지(安敬智) 안 징(安 徵) 안 위(安 衛) 안 철(安 徹) 나신도(羅伸道) 나팔기(羅八起) 안대규(安大規)
   1654년(효종 5)
   
   2월, 8월 중정(中丁)
   
학당서원은 1654년(효종 5)에 창건하고 1869년(고종 6)에 철폐되었던 것을 197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당에는 안처(安處)를 중심으로 정담(鄭湛), 안경지(安敬智), 안징(安徵), 안위(安衛), 안철(安徹), 나신도(羅伸道), 나팔기(羅八起), 안대규(安大規) 등이 모셔져 있다.

1)주벽-안처(安處)
조선 중기 학자, 호는 청은(淸隱), 본관은 순흥, 안향의 12대손 흥업의 아들이다. 벼슬은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고 안원군에 봉해졌다. 세종 때 청백리에 뽑혔다.
 
2)정담(鄭湛, ?∼1592)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 본관은 영덕(盈德). 자는 언결(彦潔). 아버지는 창국(昌國)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이탕개(尼湯介)의 변에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에 김제군수로 나갔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의 지휘 하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웅치(熊峙)를 방어하였다.이 때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을 7월 7·8일 양일간에 걸쳐 웅치에서 백병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방어하여 그들의 진격을 막고, 모두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그 충절에 경의를 표시하여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 라는 묘비를 세웠다. 1690년(숙종 16)에 정문이 세워졌고,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3)안경지(安敬智)
조선 선조 때 유학자, 자는 악천(樂天),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순흥이며 김제 출생이다. 성혼의 문인이며 효우와 덕행으로 이름 있었다. 선조 때 유일(遺逸)로 선능참봉(宣陵參奉)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4)안징(安徵)
조선 선조 때 의사, 자는 중훈(仲勳), 호는 반매당(伴梅堂), 본관은 순흥,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능산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5)안위(安衛, 1563∼?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대훈(大勳). 정여립(鄭汝立)의 종질이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무과에 급제, 찰방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되었다. 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전부장(前部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1597년 1월 부산의 왜군 화약고에 불을 질러 이를 폭파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의 지휘 하에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서 왜선 20여 척을 격파, 선조로부터 ≪무경칠서 武經七書≫를 상으로 받았다. 이듬해 전라우수사가 되고 1601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역적 정여립의 조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임진왜란 때의 전공자로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뽑을 때20명 가운데 들었다. 그 해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방군징포(放軍徵布 : 군역을 면해주는 대가로 포를 받음)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당하였다. 1605년 충청수사로 재기용되고 이듬해 경상좌수사, 1612년(광해군 4) 포도가대장(捕盜假大將 :임시 포도대장)이 되었다. 이듬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있던 중 동향인 진사 조덕홍(趙德弘)·조응직(趙應循) 등의 역모를 고했다가 무고임이 드러나 반좌(反坐 : 무고로 입힌 죄만큼 죄가 부여됨)되어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곧 재기용되어 평안도 강변별장이 되고 1619년 평안도방어사, 1624년(인조 2) 행사용(行司勇)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왕을 호종하기 위해 상경하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돌아왔다.
 
6)안철(安徹)
자는 공급(公及),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순흥,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효학(孝學)이 남달라 여러 차례 천거되어 이름났다.
 
7)나신도(羅伸道)
조선 선조 때 무신, 자는 입부(立夫), 호는 월곡(月谷), 본관은 나주이며 김제출생이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 충청병사 최호와 함께 홍산 싸움에서 왜적을 토벌한 공이 있어 정난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정유재란 때 전라수사 이억기와 경상좌수사 최호 등과 함께 진해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밤중에 적의 기습을 받고 병졸들이 흩어지자 그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끝까지 싸워 공을 세워 절충장군행함경북도 병마우후(折衝將軍行咸鏡北道 兵馬虞候)가 되었다.
 
8)나팔기(羅八起)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숙지, 호는 월암(月岩). 본관은 나주, 절충장군 헌의 아들이며 김제출생이다.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사헌부 감찰을 거쳐 남포현감을 지내다가 부모봉양을 위해 퇴직했다. 그 뒤 희천군수, 곡산군수, 제주목사겸 판관, 죽산 곡산도호부사 겸상주 대구양진영장을 역임하였다.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선거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비가 세워졌다. 효종이 북벌에 뜻을 두고 장사를 뽑았는데 8장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9)안대규(安大規)
조서 숙종 때 무신·청백리, 자는 국용(國用) 본관은 순흥,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는데 1670년(현종 11)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숙종 때 명천군수에 임명되어 민폐가 심한 고을을 권선징악 권농무학(勸善懲惡 勸農務學)으로 미풍을 진작시켰다.그 공으로 승지로 임명되고 청백리로 꼽혔다.

학당서원은 앞면 3칸, 옆면 2칸, 맞배지붕의 사당과 강당이 있다.

참고-김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