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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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백석서원(白石書院)
   전라북도 김제시 갈공동 갈공마을 508
   유 집(柳 楫) 조 속(趙 涑) 유 도(柳 棹)
   1652년(효종 3)
   
   2월, 8월 중정(中丁)
   
백석서원은 1652년(효종 3) 유집(柳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승방산에 세워졌던 하나의 사당이었다. 1696년(숙종 22)조속(趙涑)을 추가배향하고, 그 뒤 유도(柳棹)를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고 1902년 지금의 자리에 단(壇)을 설치하였으며 1946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유집(柳楫, 1585∼16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용여(用汝), 호는 백석(白石). 아버지는 형조좌랑 태형(泰亨)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로 승지에 증직된 유정(惟精)의 딸이다.
최명룡(崔命龍)·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인조반정 후 김장생의 천거로 오수찰방(獒樹察訪)에 제수되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에서 의병모집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 뒤 고향에 은거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1630년 다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1636년 기린찰방(麒麟察訪), 이듬해 왕자사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모두 사양하였다.
1650년(효종 1) 왕이 자의(諮議)로 불렀으나, 병들어 나아가지 못하였다. 특히, ≪대학 大學≫·≪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 등을 탐구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김제의 백석서원(白石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저서로는 ≪백석유고≫가 있다.
 
2)조속(趙涑, 1595∼1668)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취병(醉病).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아버지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 : 나라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을 사퇴하였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저서로 ≪창강일기 滄江日記≫가 있으며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받았다.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함에도 구애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 삼절(詩書畫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梅)·죽(竹)·산수와 더불어 수묵 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특히 까치나 수금(水禽) 등을 소재로 한 수묵 화조화에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明代)의 화조화가(花鳥畫家)인 임량(林良)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국 특유의 정취 짙은 서정 세계와 상통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지운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이하영(李夏英) 등에게로 이어졌다. 그밖에도 공필풍(工筆風)의<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와 같이 주목되는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특히 미법(米法)을 기조로 하여 다루어진 <호촌연의도>는 조선시대 남종화(南宗畫) 발전의 초기 단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에도 관심을 보여 그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의 수집 활동을 시작한 이 방면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와 <매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 梅鵲圖> 등이 있다.
 
3)유도(柳棹, 1604∼166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용제(用濟), 호는 반곡(盤谷). 김제 출신. 한성판윤 현원(顯元)의 8세손으로 좌랑 태형(泰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대인(大仁)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조평(趙平)의 문하에서 형 집(楫)과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여 도학과 절행이 뛰어났으므로, 세상사람들이 옛날 주돈이(周敦頤) 문하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추앙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 집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창의하였는데,격문에 감동한 청장년 수백명이 모여들자 군량을 모아 진군하였으나 과천에 이르러 화해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북녘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세상을 등지고 시서(詩書)를 즐기면서 후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660년(현종 1) 통선랑(通善郎)에 제수되고 그 뒤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동몽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제의 백석서원(白石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반곡유고 盤谷遺稿≫ 2권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유집·조속·유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참고-김제문화원, 김제의 숨결-김제시편, 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