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곡서원(雲谷書院)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
   주 희(朱 熹) 김 제(金 濟) 김 주(金 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1766년(영조 42)
   
   (음력) 3월 9일
   
1766년(영조 42) 고창 모양 당산에 창건되었다. 김제(金濟)·김주(金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43년(헌종 9)에 자손이 세거하는 운곡으로 이건 하면서 주자를 모시게 되었다.
1868년(고종 8) 조령으로 사우가 훼철되었고 강당만 보존되어 오다가 1900년(광무 4) 사우가 복원되었으며 1981년 아산호 축조로 서원 주위에 거주하는 자손들은 이주하고 서원만 남아있으며 전북 고창군내 거주하는 네 분의 선생 후손들이 매년(음력) 3월 9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주희(朱熹, 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정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2)김제(金濟)
고려말 학자, 호는 백암(白巖), 시호는 충개(忠介), 본관은 선산이다. 1362년(공민왕 11)에 선산군 옥성면 주아리에서 출생, 고려가 망하자 벽에 시를 지어 붙이고 바다로 가 통곡하고는 이름을 제해(濟海)로 바꾸고 처자를 버리고 노립(蘆立)을 쓰고 바다로 가 뗏목을 타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정조가 이 사실을 듣고 감탄하여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다.
 
3)김주(金澍)
고려말 충신, 호는 농암(籠巖), 시호는 충정(忠貞), 제의 아우, 1365년(공민왕 14) 선산군 옥성면 주아리에서 출생하였다. 문과에 올라 예의판서로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3일을 통곡하고는, 처자를 버리고 형초(荆楚)로 들어가 은둔하니 명제가 가상히 여겨 예부상서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정조 때 시호와 부조(不祧)의 명이 내렸다.
 
4)김숙자(金叔滋, 1389∼1456)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 선산 출신.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은유(恩宥)이고, 아버지는 관(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이다.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종직(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동몽수지 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사서오경·≪자치통감≫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5)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은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彜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주희·김제·김주·김숙자·김종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산김씨자료)-카페,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