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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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산서원(東山書院)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이경여(李敬輿) 이해서(李海敍)
   1718년(숙종 44)
   1721년(경종 1)
   미상
   
1718년(숙종 4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경여(李敬輿)·이민서(李敏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그 뒤 이관명(李觀命)·이건명(李健命)을 추가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721년(경종 1) ‘동산(東山)’이라고 사액되었다가 1729년(영조 5)에 이르러 철액(撤額)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유허지만 남아 있다.

1)주벽-이경여(李敬輿, 1585∼165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세종의 7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극강(克綱)이고, 아버지는 목사 수록(綏祿)이며, 어머니는 송제신(宋濟臣)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수찬(修撰)에 취임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다.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副提學)·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해 선비 양성의 방책을 올렸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해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 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 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이해서(李海敍)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 경여의 아들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부친이 흥덕에 유배되자 함께 와 유풍을 크게 떨쳤고 도학문장이 당세의 사표가 되었다. 벼슬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3)이관명(李觀命, 1661∼17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수록(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판서 민서(敏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좌의정 두표(斗杓)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공조정랑을 거쳐 함열현감이 되었다. 1698년 알성문과에 급제, 전조랑(銓曹郎)·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조·병조·예조 등의 참판을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으며, 이듬해 신임사화 때 아우 건명(健命)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되어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외직에 있을 때 민은(民隱)을 잘 보살폈고, 시폐(時弊)의 시정책을 촉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다. 또한, 묘당에서는 임금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응제문(應製文)·반교문(頒敎文)·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는 ≪병산집≫ 15권8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4) 이건명(李健命, 1663∼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수록(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민서(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 :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 10권이 전한다.



참고-전북향교원우대관, 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