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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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암서원(道巖書院)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819
   김 질(金 質) 김익철(金益哲) 김경철(金景哲)
   1572년(선조 5)
   
    2월 18일
   고창군향토문화유산 제7호(2005.06.17지정)
도암서원 1613년(광해군 5)에 세워졌다고 전하며, 이곳에는 김질(金質)을 배향하여 오다가 그의 증손인 김익철(金益哲)과 그의 아우인 김경철(金景哲)을 1847(헌종 13)에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882년(고종 19)에 복설되었다.

1)주벽-김질(金質, 1496∼155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안변부사 언룡(彦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만(乙萬)이고, 아버지는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 복중(福重)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 이원경(李元經)의 딸이다.
평양 토관(土官)으로 1528년(중종 23)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에서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는 동안 부인마저 멀리하여 동네 사람들은 지극한 효도에 감동, 묘소가 있는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하였다. 홀아버지를 효성으로 모시다가 그마저 죽자 옷이 해어지도록 갈아입지 않고 풀과 채소로 연명하며 3년간 여묘(廬墓 : 묘 근처에 조그마한 처소를 지어 그곳에서 생활함)하면서 삭망·4명절·소상(小祥) 때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집이 가난하여 제사에 쓸 제물이 없어 통곡을 하니 날던 꿩이 떨어졌다 하며, 제사에 쓸 장을 쥐가 흐려놓아 이를 한탄하니 밤사이에 쥐들이 무리를 지어 장독 아래에 죽어 있었다고 한다. 1546년(명종 1) 명종이 그의 효행을 듣고 특별히 정려(旌閭)를 내려 표창하였다.
특히, 그의 인물됨을 높이 사서 김인후(金麟厚)는 그의 집을 영모(永慕)라 하였으며, 유희춘(柳希春)도 그의 행위를 경모하였다. 한때는 기대승(奇大升)·양응정(梁應鼎)과도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영모록 永慕錄≫·≪육사자책설 六事自責說≫이 있다. 사후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2)김경철(金景哲)
조선 선조대 학자·의사, 자는 윤보(允甫), 호는 은송당(隱松堂), 영모당(永慕堂) 질의 증손으로 1569년(선조 6) 출생, 모병(母病)에 정성껏 간호하고 하늘에 빌었으며 위독하자 열지진혈(裂指進血)하였다. 전 후상에 6년 여묘(廬墓)했다. 위기(爲己)의 학(學)에 전심하여 사서, 오경, 근사록, 가례에 잠심(潛心)하고 덕의를 숭상했다. 정유재란에 거의(擧義)하고 이괄의 난에 의병을 모으고 양곡을 비축하였다. 이 공으로 천거되어 복호(復戶)가 내렸으나 받지 아니하고 남원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3)김익철(金益哲)
임진왜란 때 창의한 선비, 자는 우보, 호는 현무재(賢武齋), 경철의 아우이다. 1571년(선조 8)출생, 16세에 음직(蔭職)으로 직장(直長)을 거쳐 18세에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용만(龍灣)으로 몽진할 때 산직(散職)으로 호종(扈從)하여 왕을 업고 80리를 달렸다. 이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주부(主簿)가 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위해 귀향하여 전 후상에 애훼(哀毀)가 禮에 넘쳤다. 병자호란에도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義穀)을 모았다.

현재 도암사에는 사우를 비롯하여 내삼문, 효자각, 김질의 녹권을 둔 봉안각, 영모당(정면 4칸, 측면 3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골목입구에 홍살문에 세워졌다.
사우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전후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나 나머지 부분에는 방주를 세웠다. 동단의 두리기둥은 하부가 심하게 풍화되어서 잘라내고 석주의 동자기둥을 세웠다. 정면 각 間에는 두작 여닫이의 교살문을 닫아 출입하도록 되었다. 건물 자체에는 특별한 장식을 베풀지 않았으며 단청조차 올리지 않았으나 오히려 이러한 이유 때문에 古拙하고 질박한 분위기를 나타내 주고 있다.
효자각은 재삼문 정면 서측에, 봉안각은 동측에 세워졌다. 내삼문도 솟을대문 형식이 아니고 평대문으로 되어있다.
영모당은 중앙 2칸에 대청을, 그리고 좌우 양측에 가각 한 칸 크기의 방을 들이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퇴 전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이나 나머지는 방주를 사용하였다.
영모당 김질은 조정과 중국에 까지 알려진 대효(大孝)일 뿐 아니라 충(忠)을 겸하여 녹권 봉안각을 갖추고 있는데, 영모당, 정려, 봉안각이 다 오랜 역사를 추정할 수 있고, 봉안각의 녹권함과 하마비 또한 이 고장 유일한 유물로 문화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참고-전라북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