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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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반곡서원(盤谷書院)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367
   송시열(宋時烈) 김진규(金鎭圭) 김창집(金昌集) 민진원(閔鎭遠) 이중협(李重協) 김수근(金洙根)
   1704년(숙종 30)
   
    3월, 9월 중정(中丁)
   
1704년(숙종 30)에 유림 윤도원(尹道元), 옥삼헌(玉三獻),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창건하여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주벽으로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 선생을 배향으로 봉안하고 있다.
그 후 1863년(철종 계해)에 단암 민진원(丹巖 閔鎭遠), 삼호 이중협(三湖 李重協), 계산 김수근(谿山 金洙根)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봉행하고 있었으며, 1868년(고종 5) 무진에 대원군 서원폐지령에 의하여 본원이 폐철되었다. 1906년(광무 10)에 향유의 불승모현하는 정성으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가을철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하였다.
1971년 신해에 거제군이 복군 된지도 어언 18년이 지난 때에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尹炳材)가 반곡서원의 복원을 발의하여 유림총회의 득찬으로 우암사를 중건하고 고재(古齋)를 보수하였으며, 고자실은 도비보조로 개축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는 대역사는 4년이 흘러서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 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2칸의 전사청, 정문,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에는 송시열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김진규와 김창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며, 동재는 제원들의 숙소로,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전사청은 향사 때 제물(祭物)을 보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지키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서원 뒤에는 우암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암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제당과 왼쪽에 동록 정혼성(鄭渾性)선생을 모신 독록당이 있다.

 
송시열(宋時烈)과 반곡서원(盤谷書院)
고영화의 거제산책
 
1. 개요
경상우도에 속하는 거제도는 본디 고현동 거제향교 시절부터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으나, 송시열의 거제도 유배가 계기가 되어 노론계 학문이 널리 숭상되었다.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은 1704년 영남 노론계 서원중 하나로써, 거제유림들과 송시열 문인인 전극화(全克和,16481718)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로 인해 공교육기관인 거제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퇴색하고 사립학교 반곡서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송시열선생은 거제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하였고 거제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 거제유림들이 유배지 배소에다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선생을 추모하니, 반곡서원 일대가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1689년 김진규 선생과 1722년 김창집 선생의 연이은 거제면 동상리 유배로 인해, 거제도에는 유학의 절정기를 맞았다. 거제의 유림들은 중앙정계의 파당에 관계없이 조선말기까지 안동 도산서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제를 올리기도 했다.
1690년대 초 거제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1706년 우부승지 허지(許墀) 등의 거제서원 사액 상소 1862년 철종13년에 거제 유림에서 2차례, 즉 윤8李秉瑀(이병우)356(三百五十六人), 11金濩根(김호근)178(一百七十八人)의 총 4차례의 상소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끝내 사액을 받지는 못했다. 현재 6분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송시열의 '우암사'와 거제학자 정혼성의 '동록당'을 갖추고 있다.
 
2. 영남 노론과 거제반곡서원
1). 거제도는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일파가 몰락하자, 남명학파가 분해되어 일부는 퇴계학파에 합류했고, 일부는 정계 진출 및 생존의 차원에서 서인에게 접근하였으므로, 남명의 학통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했다.
영남의 노론으로는 상주지역에 창령 성씨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옥천 전씨가 있었다. 옥천전씨는 대구의 대표적인 노론(서인) 가문으로, 전유장(全有章)이 현종 8(1667) 3월에 양현승무소를 올렸다. 전유장은 전유경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아들 모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아들 전극태는 함창의 채하징과 송시열변무소를 올린 바 있다. 종유록을 보면, 중앙의 노론계 인사 및 다른 영남지역의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전극념과 전극화(全克和,16481718)는 김장생 승무소를 올린 바 있으며, 특히 전극화는 거제와 장기에 송시열 서원을 건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극초는 송시열의 덕원 적소행을 배행하였고, 만년에 명왕조가 망하자 동지 13과 팔공산에 은거하였다. 숙종 19(1693) 14후손들이 유계(儒契)를 만들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여름에 수계(修契)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인동의 향전에 깊이 관여하였다.
청도의 밀양박씨 가문은 대구의 대표적인 서인(노론) 집안인 옥천 전씨와의 결혼관계로 맺어진 집안이다. 박내장(朴乃章)이 옥천전씨 시헌의 딸과, 박지현(朴之賢)은 옥천전씨 유장의 딸과, 그리고 박미장(朴彌章)의 사위가 전극념이다. 이 집안의 사승관계를 박지현(朴之賢,16341681)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증조 양복(陽復)은 일찍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부 박내장(朴乃章,16021665)은 장현광 문인이고, 박지현의 박선장(朴宣章,16081685)은 사계 김장생 문인이다. 박지현의 아들 박태고(朴太古,1656~1704)는 전극태를 따라 거제로 귀양 온 송시열을 찾아뵙고 입문하였으며, 손자 박중채(朴重采, 16791750)는 권상하 문인이다.
거제의 반곡서원과 장기의 죽림서원은 전극화의 주도로, 거제의 옥삼헌(玉三獻)과 장기의 오도전 등 지역의 송시열 문인 중심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옥삼헌과 오도전은 반곡죽림서원의 수장도원장(院首道院長)이 되었다.
 
2). 거제는 송시열이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터에서 적거생활 1여년밖에 되지 않아 영향이 크지 않았으나, 뒤이은 김진규의 유배로 인하여 리명(里名)을 도론동(道論洞)이라 할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전극화는 종백씨(전극흠)와 함께 숙종 29(1703)에 거제로 들어가 읍유들과 서당 건립을 상의하여, 읍의 원님이 재력을 모아 서당 이름을 승석당(勝昔堂)으로 정하였다. 거제선비(士人) 옥삼헌(玉三獻) 등이 유상을 모셔와 승석당에 봉안하고 묘우 강당을 지어 김진규에게 봉안문을 청하였다. 숙종 31(1705) 5월 상순에 전극화는 원수(院首)로서 욕례(縟禮)를 성대하게 치루었다(연방집권6, 툌낙포유고툍죽림서원창건일기).
장기는 송시열이 숙종 1(1675) 615일 덕원에서 이배되어 숙종 5(1679) 4월에 거제로 이배 되기까지 5년여 동안 귀양살이 했던 곳이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송시열은 강학을 멈추지 않아 대구의 전극태 형제를 비롯 많은 선비(士人)들이 입문하였다. 그 후 장기의 사인들에게서 입사(立祠)에 대한 논의가 없자, 전극화는 거제의 반곡서원 봉안례에서 오도전(吳道全)에게 입사할 것을 촉구하고, 자신이 직접 숙종 33(1707)에 서울로 가서 유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
 
[] 오도전(吳道全) : 자는 여완, 호는 경암, 본관은 해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왔을 때 공의 집에서 거처하였으므로, 문정공의 교화에 힘입어 문장이 뛰어났으며, 장기현의 훈장으로 후진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견문학행이 출중하여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고 예절을 정비하여 많은 유풍선속을 전수하는데 공헌하였고, 공의 행적은 죽림원록에 기록되어 있다.
 
 
3). 영남지방 노론계 서원의 건립현황을 보면, 숙종 27년 장희빈이 사사되고 남인세가 현저히 약화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영남사림들은 이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같은 지역내에 남인계 서원건립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남지방에 한정된 상황은 아니고 거의 전국적인 추세였다. 조정에서는 서원이 남설되자 몇 차례 남설금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환국이 되풀이 되고, 자파계 인물의 신원과 자파세력 부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앙집권세력들인 노론은 남인의 정계 진출 기도를 하면서, 영남지역을 자기 당파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와 탄압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영조년간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노론계 감사나 수령 등을 부임시키면서 영남 남인의 향권에 대한 진압과 침탈을 본
노론의 영남에 대한 이 같은 시책 결과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향론을 주도해 왔던 전통 남인세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고 양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세기 노론학계는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어 정계와 학계가 낙론의 주도 속에 근기남인들의 부분 참여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호서호남영남지역은 점점 정계에서 소외되고, 지역성은 더 고착되었다. 이는 중앙정계와 당색을 달리하는 영남지역에서 더 심하였다.
 
3. 거제반곡서원 창건
1). 거제의 반곡서원은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자고등학교 뒤편에 소재하며, 1704년 숙종 30년 갑신년에 거제유림 옥삼헌(玉三獻), 윤도원(尹道元),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창건하였다. 옥삼헌이 반곡서원의 초대수장(院首)을 맡았다.
文正公(문정공) 宋時烈(송시열)을 주벽으로 忠獻公(충헌공) 몽와 金昌集(김창집), 文淸公(문청공) 죽천 金鎭圭(김진규), 副提(부제) 學公(학공) 삼호 李重協(이중협), 文忠公(문충공) 단암 閔鎭遠(민진원), 正文公(정문공) 계산 金洙根(김수근)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통행하고 있었으며 1868년 고종 5년 무진에 대원군 서원 폐지령에 의하여 본원이 철폐되었다.
1906년 광무 10년 병오에 향유의 불승모현(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복받쳐 참지 못함)하는 정성으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가을철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하여 오다가 1971년 신해에 거제군이 복군된지도 어언 18년이 지난 때에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尹炳材)가 반곡서원의 복원을 발의하여 유림총회의 득찬으로 우암사를 중건하고 고재(古齋)를 보수하였으며, 고자실은 도비 보조로 개축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는 대역사는 4년이 흘러서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뒤에는 우암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암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제당과 왼쪽에 동록 정혼성(鄭渾性)선생을 모신 동록당이 있다. 거제시에서는 거제반곡서원복원공사를 20106월부터 20126월까지 대지규모 2,761평방미터로 확장하고 총사업비 23억원을 투입하여 복원하고 있다.
 
2). 반곡서원 창건 과정을 살펴보면, 1704년이 서원의 공식 창건년도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간결한 사당과 서재, 강당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1689~1694년 거제 동상리 일대에 귀양살이 한 김진규(金鎭圭)선생의 죽천집 "[代嶺南儒生請巨濟尤庵書院賜額영남유생을 대신하여 "거제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송시열선생께서 유배 살던 읍치의 동쪽 "반곡"골짜기에 반곡서원이 세워진 과정을 소개한다. 선생이 유배 온 후, "송시열선생의 높은 덕()에 고을 사람들이 감화되어 교화를 받았으며 선생의 사망 후, 유생들의 추모가 그치질 않아 골짜기에 집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집이 엉망이 되어, 처음에는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곳에다, 송시열 화상을 구하고, 몇 개의 서까래로 집을 지어 화상을 모신 사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하여 선생이 우거했던 배소(配所)곁에다가 사당을 짓고 그 화상을 받들고 널빤지로 위패를
만들었으며 서재와 강당을 지어 서원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학장(學長)을 배치하고 학생을 선발하여, 시와 글씨로 매우 열심히 공부하니, 거문고 소리와 시()를 읊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 김춘택(金春澤)]의 송시열선생의 화상 기록엔 당시 거제 반곡서원으로 선생의 "초상화"를 보내 서원에다 모셨다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이 지은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된 역사책]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편과 남당선생문집(南塘先生文集)의 김창집선생 기록에는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숙종301704년 갑신년에 세웠고, 처음에는 송시열(宋時烈) 선생만 배향하다 이후 1726년 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이조 판서에 증직)과 김창집(金昌集)선생 두 분을 차례로 배향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1800년대 중기까지 세분을 배향하다가 1856년부터 민진원(閔鎭遠), 이중협(李重協)선생을 추가로 배사(配祀)했고 1860년 전후에 김수근(金洙
)선생을 마지막으로 배향하여 모두 여섯 분을 모시고 있다한다.
 
3). 반곡서원의 명칭의 변경에 대해 살펴보면, 처음 서원을 세울 때는 '거제우암서원(1690년대초~1704)'으로 창건 후에는 '거제서원(1704~1750년대)' 불리다가 '거제반곡서원'을 거쳐 '반곡서원'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거제서원의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 함) 상소는 현재 전해지는 글이 총 4개가 있다.
 
4). 또한 남당선생문집(南塘先生文集) 한원진(韓元震)의 저서,"[巨濟書院奉安夢窩先生祭文 거제서원에서 봉안하는 몽아 김창집]"편 내용 중에는 1726년 김진규선생과 김창집선생의 거제서원(반곡서원)에 두 분을 제향하는 글이 있는데, 거제 배소지에서 귀양살이 했던 것과 비슷한 사상과 가치를 지닌 두 분이라, 함께 배향한다고 적고 있다. 아래는 두 분의 봉안(奉安)시 주의 내용을 일부 발췌했다.
 
盛儀載擧(성의재거) 성대한 의식으로 낱낱이 들어 행하되,
籩豆式陳(변두식진) "제사그릇, 변과 두를 의식에 사용하고
衮衣赤舃(곤의적석) 곤룡포 옷을 입고 임금의 붉은 가죽신을 신어라."
髣髴有覩(방불유도) "분간함에 있도록 거의 비슷하게 해라."
肴芳醴淸(효방예청) "꽃 같은 안주에 맑은 단술을 사용하고
庶幾歆顧(서기흠고) 바라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