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 송준길은 율곡과 사계의 문인으로 학문에 뛰어나서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병자호란 뒤 북상면 월성리에 와서 초당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후인들이 성천서원을 세워서 증수 하였다. 그가 은거한 곳은 사선대로 이 곳은 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은 전설이 있으며 송기 혹은 송대라고도 불렸다.
동춘당 송준길은 인조 14년(1636) 6월23일에 김상용(金尙容)의 천거로 예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실록》.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음으로 피병(避兵)하고 그곳의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향리로 귀환하여 학도들을 가르쳤다. "丙子…是冬 避兵至安陰 愛其山高水淸 居一年 始還鄕里 學徒日衆" 《同春堂集 송시열이 지은 墓誌文》. 안음의 어디에서 살았을까? 『안의현읍지』 방리(坊里) 조에 보면 북상면(北上面)이 있고 그 소속 촌에 "월성(月星);문정공 송준길이 일찍이 우거하였다."라고 하였고 서상면(西上面)이 있는데 그 소속 촌에 "노천(蘆川);문정공 송준길이 잠시 우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월성은 현재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이고 그곳 내계마을에는 송준길이 은거했던 송여산기(宋礪山基)에 다시 세운 월성초당이 남아 있고, 월성리 월성마을에서 황점(黃店)마을 가는 중간 월성1교 옆 길가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는데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어서 송대(松臺)라 하기도 한 송준길의 유적이다.
병자호란 12월 청병 침입
정축 1637 인조15년 1월 동춘당 송준길 화림동 노계촌(蘆谿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 소로, 노상마을)에 피난, 우거
2월 남한산성 항복, 월성촌(月城邨)으로 이거
무인 1638 1월 사산(沙山,공주 사한리)으로 귀환
5년 뒤 송촌(宋邨:대전시)으로 귀환
효종(1649~1959)초 문의현 검호(黔湖)에 보만정 건립
계미 1703, 숙종29년 성천서원 건립
임술년간 1742, 영조18년 안음현감 조영석이 안의향교 옆 1백보 지역으로 이건
기묘 1759, 영조35년 6월(연보에는 5월) 동춘당의 후손 역천 송명흠(당시 55세)이 성천서원과 월성초당 터를 방문하고 향교 옆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초당터로 서원을 이건하자고 주장. <기월성고사>를 짓다. <月淵巖 次贈全斯文允錫>
월성유허 서시경조재청종인 月城遺墟 書示景祖載淸宗人
오조유서지 吾祖幽棲地
황량난부심 荒凉難復尋
호위하성후 胡爲下城後
우차입산심 又此入山深
상상채미적 想像採薇跡
분명도해심 分明蹈海心
수이운곡묘 誰移雲谷廟
대의게비음 大義揭碑陰
갑신 1764, 영조40년 10월 역천 60세 가야산과 덕유산 유람. 안의삼동을 유람하고 성천서원 참배, 지리산 용유담 유람하고 군자사에 숙박. <劉子精彦一追至智異山後 爲誦其送友詩求和 戱作禪語以答之>
정해 1767,영조43년 3월 역천 63세 거창군 북상면 월성에 들어가 초당 터를 매입, 월성초당 3간을 건립, 동춘당의 유물 죽유(대나무창문)와 모란을 이식하고 귀환, 귀로에 완계서원(거창군 주상면 넘터마을)과 창주서원 참배.
화주계사군이익진운 사조월성초당자 和朱溪使君李翼鎭韻 謝助月城草堂貲
학동심심처 鶴洞深深處
연하울미개 煙霞鬱未開
백년유촉비 百年遺躅秘
칠일유붕래 七日有朋來
사자영동우 捨貲營棟宇
매산전초래 買山剪草萊
감군행고의 感君行古義
탄식구배회 歎息久徘徊
<將入月城 滯雨宿龍潭江村 和李景修基普韻 丁亥>
고종 무진년(1868)에는 전국적인 서원 훼철령이 있어 훼철하게 되었다.
그 후 누차에 걸쳐 서원 복원론이 대두되다가 1999년 향중유림의 정기총회에서 본 원의 복설과 중건을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찬동을 받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군청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대전 본손으로 부터 협찬을 받아 향중유림들의 동참으로 옛터인 월성초당에 부지를 정하여 가당과 사우를 2000년 4월에 완공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서원훼철전 1716년에 충헌공 이숙(전경상도관찰사)를 추배하였고 1811년 문원공 송명흠을 추배하였다가 2000년부터 폐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