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산서원(德山書院)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 467
   이호성(李好誠), 이 희(李 僖), 이 간(李 侃)
   1823년(순조 23)
   
   陽曆 4월1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호(1983.07.20지정)
덕산서원은 1823년(순조 23)에 창건되었으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전국서원 중에서 47개만을 남기고 통폐합할 때 훼철되었다. 1883년 후손들의 정성으로 옛터에 오량사가(五梁四架)의 한옥으로 중건하였으며, 고성군수 달성인(達城人) 서기수(徐淇修)가 중수기문(重修記文)을 남겼다. 1926년 9월 다시 중수하였으나 오랜세월에 낡고 퇴락하여 1995년 6월에 중건하고 고성향교 유림 및 각 문중대표 주관으로 낙성고유식을 거행하였다. 건물의 공간구성은 풍수지리학적 지형지세에 따라 선현에 제사지내는 사당인 경덕사(敬德祠)와 강학공간인 덕산서원(德山書院) 및 일출문(日出門)으로 구성하였으며, 원내(院內)에 정무공 이호성(李好誠)과 병사공 이간(李侃)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1)주벽- 이호성(李好誠)
이호성(1395〜1468)의 본관은 성산(星山)이었으나 조선 영조 때 관향을 성산・광평(星山・廣平)으로 하였다. 벼슬이 오위도총관 및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무(靖武)이다. 세종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거제현령으로 부임한 후 진관체제(鎭管體制)를 확립하여 왜구를 물리치고 위민치안(爲民治績)과 청백리명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경주부윤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ㆍ경사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제수되었다.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행정실무에 수완을 발휘하였고 무예와 병법에 뛰어났다. 1433년 최윤덕(崔潤德)장군이 4군(郡)을 설치할 때, 막료로 참여하여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궁마술(弓馬術)이 탁월하여「비장군(飛將軍)」의 칭호를 받았으며,『왕조실록』에 기록되어 후세 인물평가에 척도가 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그의 학식과 덕망과 능숙한 국정수행을 격려하시고 무(武)・용(勇)・청(淸)・개(介)의 4자(字) 어필휘호(御筆揮毫)를 하사하였다. 묘소는 경북 김천시 양천동 산65-4번지 안정산(安靖山)에 있으며 마을이름도 안정포(安靖浦)라 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경남 함안군 검암리 116번지 동산정(東山亭)에 있다. 암포서원(巖浦書院)ㆍ황곡서원(篁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2)이희(李僖)
이희(李僖)의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字)는 사선(士善)이며 호는 가은(伽隱)이다. 벼슬이 선교랑(宣敎郞)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8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매 슬퍼함이 성인과 같았다고 한다. 모부인(母夫人)이 허약함을 생각하여 어육(魚肉)을 먹도록 권했으나 울면서 좇지 아니하고 죽으로 삼년상(三年喪)을 마쳤으며, 모부인(母夫人) 병환에는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주입하여 소생하게 하였다. 배(配)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송계(松溪) 계성(季誠)의 손녀(孫女)이며, 정유년(丁酉年)에 왜놈들이 다시 쳐들어 올 때 낮에는 시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고 밤이면 집에 내려와 향불 피움이 끊이지 않았다. 갑자기 적병(賊兵)이 들이 닥쳐 위기일발인지라 치욕(恥辱)을 당할 수 없는 절개심 때문에 손칼로서 자결(自決)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열부정려각(烈婦旌閭閣)을 세웠다. 간송(澗松) 조임도( 趙任道)선생이 다음과 같이 시(詩)로서 칭송하였다.
 
「갑자기 亂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꽃다운 이름은 竇娥보다 훌륭하도다 」
 
노파(老坡) 이(李)선생의 흘(屹)에 찬(讚)하여 가로되 “백옥(白玉)은 검게 물들지 않으며, 그 기개(氣槪)는 가을하늘보다 맑고 광채(光彩)는 백일(白日)과 다르도다.” 하였으며, 또 규장각(奎章閣) 서기수(徐淇修) 찬(撰) 『정려기(旌閭記)』에 “후덕한 남편이 있어 현숙한 처(妻)가 있다”고 하였고, 『논어』를 인용하여 ‘충신(忠臣)과 열녀(烈女)는 모두가 효자(孝子) 가문에서 난다’는 말로 비유하여 칭송하였다.
 
3)이간(李侃)
이간(李侃)은 1535년생으로, 자(字)는 사집(士集)이며 호는 해사(海槎)이다. 1569년 창신교위 행충무위 부사직(彰信校尉 行忠武衛 副司直)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의령과 함안(咸安)에 진을 치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장군과 더불어 앞뒤에서 적군을 공격하여 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경상우도를 지켰으며, 임진왜란 훈공으로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功臣1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1596년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하고 1599년 부녕부사(富寧府使)하고 1600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하고 1602년 동래부사(東萊府使)하고 1606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하고 1607년 전라병사(全羅兵使)하고 1609년 충청수사(忠淸水使)하고 1612년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하다. 1958년10월 의성(義城) 김황(金榥)은 이간(李侃)에 대한 임진왜란 훈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詩)를 지어 칭송하였다.
 
「壬辰倭亂이 일어날 때 嶺南이 먼저 侵攻을 당하였네
慘酷한 禍를 입었으며 훌륭한 功을 세웠도다.
憤怒하여 모인 의병들이 鶴蜂을 將帥로 推戴하였네
忘憂堂의 義憤의 名望이 높았도다
오직 李公이 제일 굳세어 앞서고 뒤따르며 文忠과 忠翼을 따랐도다.
適材適所에서 몸소 模範을 보였네
兄弟가 서로 도와 그리워하며 슬픔도 품었다.
겨우 큰 功 을 세우고 돌아와선 벼슬길에 精誠을 다하였네
烽火를 거두니 太平聖代라 어진 臣下가 聖君을 만났도다
盛世에 노닐어 閑暇한 몸을 즐겼도다
功臣에 들면 무엇하며 將軍의 旗가 무엇이 높은가
항상 本分을 지켜 어찌 벼슬의 높고 낮음을 헤아렸겠는가
만약 時流따라 살았더라면 榮華를 누렸을 것이다.
隱居하던 咸安은 漠漠힌데 남기신 風度는 지금 떨치네
碑石에 글로 顯揚하니 이로서 永遠할 것이다. 」
 
지형지세(地形地勢)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정기(精氣)가 태백산과 소백산을 한바퀴 돌면서 여러 봉우리를 만든 후 다시 낮아진 덕주봉(德注峰)의 줄기가 북쪽으로 꾸불꾸불 뻗어가다가 새가 날개를 좌우로 편 듯하고 송황(松篁)과 연수(煙樹)의 사이 은영(隱映)하는 곳에 그윽한 정기가 모여 일구를 이룬 명당에 위치하며, 산천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한번 찾은 사람은 다시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강학건물과 재(齋)와 삼문(三門)이 있으며, 그 뒤쪽으로 사당(祠堂)이 있다.

참고-『왕조실록(王朝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함안군지(咸安郡誌)』
『함주지(咸州誌)』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
『족보(族譜)』
『백과사전』
『인터넷자료
『족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