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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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위계서원(葦溪書院)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 643
   이인형(李仁亨) 이의형(李義亨) 이 허(李 詡) 이 영(李 翎) 이 현(李 顯) 이응성(李應星) 이예형(李禮亨) 이지형(李智亨) 이 규(李 逵) 이 제(李 濟)
   1844년(헌종 10)
   
   매년 3월 1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8호(1983.07.20지정)
 
 
위계서원((葦溪書院)은 1844년(헌종 10)에 창건되어 이인형(李仁亨), 이의형(李義亨), 이허(李詡), 이영(李翎), 이현(李顯), 이응성(李應星)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1869년(고종 6)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6년에 다시 세웠다. 1963년에는 이예형(李禮亨), 이지형(李智亨) 이규(李逵), 이제(李濟)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1)주벽-이인형(李仁亨, 1436~1504)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공부(公夫), 호는 매헌(梅軒). 진주(晉州) 출신 대구현령(大邱縣令) 즐(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생원(生員) 원로(元老)이고, 아버지는 대사성(大司成) 미(美)이며, 어머니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사헌부감찰 준(遵)의 딸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5, 16세에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졌다.
1455년(세조 1)에 20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재지(才智)를 인정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출사(出仕)하는 것은 교만한 성품을 기른다고 하면서 집에서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 1468년(세조 14) 춘장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1470년(성종 1) 성균관전적이 되고, 이어 홍문관 부교리·응교 등을 지냈다.
1473년(성종 4) 북평사에 임명되어서는 적의 침략에 대비가 소홀하였다는 이유로 고신(告身)을 몰수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잠시 벼슬에 뜻을 버리고 형제들과 학문에 열중하였다가 얼마 뒤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1478년(성종 9) 병조정랑 겸 승문원교감이 되었고, 이듬해는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금산군수(金山郡守)를 자청하였다. 당시 금산군에는 개령(開寧)에 요승(妖僧)이 있어 온갖 방법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속였는데, 아전을 시켜 요승을 잡아 처치하고 요승의 근거지를 불태워서 민폐를 막았다.
1485년(성종16) 홍문관 응교, 1488년(성종19)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이어 양산군수·의정부사인이 되었다. 1494년(성종25) 종부시정이 되어서는 임금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목멱산에 치제할 때 행향사(行香使)가 되었고, 1495년(연산군 1) 대사간에 올랐다.
1496년(연산군 2) 동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성종의 유고(遺稿) 정리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재시행을 청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전라도관찰사에서 체임(遞任)되었다. 1500년(연산군 6) 겸동지성균관사가 되고, 이어 한성부우윤·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1502년(연산군 8) 다시 한성부의 좌·우윤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논구유생사 論救儒生事>의 수창자로 지목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신원되어 한성부 판윤으로 추증되었다가 예조판서에 가증되고, 이어서 자손녹용(子孫錄用)의 은전을 받았다. 1844년(헌종 10) 경상남도 고성(固城)의 위계서원(葦溪書院)에 제향되었다.
 
2)주벽 이의형(李義亨, 1442~149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용보(勇甫), 호는 행헌(杏軒). 아버지는 대사성  미(美)이며, 형이 대사헌 인형(仁亨)이다. 1465년(세조11) 진사가 되었고, 형 인형과 더불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 되어 면학에 힘써 경전(經典)에 조예가 깊었다.
1466년 세조 어전(御前)에서 오기(吳起)가 지은 ≪오자병서 吳子兵書≫를 강의하였는데,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군직(軍職)을 특서(特敍)하고,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을 출납하는 선전관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이어 경상어사(慶尙御史)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의형과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의 형 인형을 궁중에 불러들여 은혜가 두터운 대우를 베풀었고, 중앙과 지방 관청의 기무(機務)를 자문하였다. 1477년(성종 8) 창평군수로 있을 때 문과 춘장시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1482년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서울 연경에 갔을 때에는 황제로부터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상(賞)으로 받았다. 1495년(연산군1년) 통훈대부 남원부사로  남원관아에서 별세하여 위계서원에 제향되었다.
 
3) 이허(李詡. 1471~1534)
본관은 함안이며 자는 화익(和翼)이고 호는 전경재(展敬齋)이다. 아버지는 남원부사 의형(義亨)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4년(성종2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애친경장(愛親敬長)하는 도리와 이유응대(怡愉應對)하는 절차가 성인(成人)과 같고 자라서는 은덕불사(隱德不仕)하고 효우에 돈독하여 고비(考妣)의 상(喪)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상제시(喪祭時)에도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고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4)이영(李翎, 1483~1519)
본관은 함안이며, 자는 여익(汝翼)이며, 호는 성재(惺齋)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인형(仁亨)이다.
중종 14년(1519)에 현량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 홍문관 저작(著作)을 거쳐 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 이때 신진사류들은 조광조(趙光祖)의 주도하에 개혁정치를 펴나가는 선봉에 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에 위훈삭제를 고비로 하여 훈구파들의 맹렬한 반발을 받게 되면서부터 마침내 기묘사화가 발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등 많은 신진사류가 죽음을 당하게 되자 조광조를 구하려고 하루 두번씩 상소하다가 차꼬(桁楊 : 두발을 나무사이에 끼워 자물쇠로 잠그는 형벌) 7일만에 용문옥(龍門獄)에서 돌아가셨으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사후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5)이현(李顯, 1545~1631)
본관은 함안이며, 자는 시회(時晦)이고, 호는 와룡(臥龍)이다. 아버지는 주부 조희(主簿 兆喜)이다. 어려서부터 유희춘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였다. 재종질(再從姪)인 이규(李逵)와 심광세(沈光世) 등과 교유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고성향교(固城鄕校)를 중수할 때 큰 공을 세었다. 사후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6)이응성(李應星, 1574~163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추보(樞甫), 호는 신천(新川). 아버지는 생원 언(彦)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1609년(광해군 1) 광해군 즉위를 경축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던 증광별시무과에 급제한 뒤, 고원(高原)군수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사람들의 무고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읍민이 풀어주기를 청하여 고원군수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런데 임지로 돌아가던 도중 문천에서, 유배소에서 죽은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유해가 당도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분향한 것이 조정에 알려져 해직되었다. 그 뒤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으며, 1634년(인조 12) 61세의 나이로 죽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고성의 위계서원(葦溪書院)에 배향되었다.
 
7)이예형(李禮亨, 1445~ )
본관은 함안이며 자는 가회(嘉會)이고 호는 오헌(梧軒)이다. 인형(仁亨)의 동생이며 김종직의 문인으로 진사가 되어 성종11년(1480)에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여 성종13년(1482)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성종 17년(1486) 중시(重試) 병과, 양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목사를 역임하였고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8)이지형(李智亨, 1448~1504)
본관은 함안이며, 자는 가중(嘉仲)이며, 호는 국헌(菊軒)이다. 인형(仁亨)의 동생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가 되고, 성종 8년(147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판결사(判決事)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로 형 인형이 화를 입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며,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 화를 입게 되자 자결하였다. 사후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9)이규(李逵, 1546~1619)
본관은 함안이며, 자는 자유(子由)이고, 호는 황파(篁坡)이다. 이정(李楨), 심광세(沈光世)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에 순수하고 행실이 독실하여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음직으로 출사하여 승사랑(承仕郞)을 역임하였고 유고(遺稿)로 임계일기(壬癸日記)와 황파예설(篁坡禮說)이 있고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0)이제(李濟, 1606~1667)
본관은 함안이며, 뒤에 덕구(德耉)로 개명하였다. 자는 경노(敬老)이고, 호는 경암(警菴)이다. 아버지는 고원군수(高原郡守) 이응성(李應星)이다. 인조26년(1648)에 진사가 되고 효종2년(1651) 문과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남해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공간은 배우는 공간으로 훌륭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는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해마다 3월 10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참고-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경남의 서원, 선인, 2008
국가문화유산포탈 http://www.heritage.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