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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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담서원(松潭書院)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161
   김득기(金得器) 송 빈(宋 賓) 유 식(柳 湜) 이대형(李大亨)
   1708년(숙종 34)
   
   (음력) 4월 20일
   경상남도기념물 제99호(1990.12.20지정)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네 의병장 김득기(金得器), 송빈(宋賓), 유식(柳湜), 이대형(李大亨)의 공을 기리고 있는 묘단(廟壇)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을 공격해 오자, 당시 성의 주장군이었던 서례원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어 이들 네 의병장이 각기 의병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 순절하였는데, 이것이 임진의병의 시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년 만인 1600년(선조 33)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각자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1708년(숙종 34) 지방사림들의 도움으로 ‘송담사’와 ‘송담서원’을 세워 이들의 위패를 모셔두었다가, 1833년(순조 33) ‘표충사’라 이름 하였다. 1871년(고종 8) 단을 설치하여 ‘사충단’이라 이름 짓고 비를 세워두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을 제사일로 정하여 제사를 모시고 있다.
현재는 비각 이외에는 모두 새로 지은 것들로, 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의 규모에, 옆에서 보아 사람 인(人)자의 선을 그리는 맞배지붕을 올리고 있다. 그 안에 모셔둔 표충단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1)김득기(金得器, 1549~1592)
자는 구오(具五), 본관은 의성이다. 아버지는 삼성(三省)이다.
그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는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구할 뜻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김해를 침범하자 송빈, 이대형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을 때 동문을 수비하였다. 이후 김해성에서 맞서 싸우다가 선조 25년(1592) 4월 20일에 죽었다. 뒤에 첨지충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2)송빈(宋賓, 1542~1592)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신(士信), 호는 송담(松潭). 할아버지는 절제사 경(經)이고, 아버지는 절제사 창(昌)이다. 어머니는 진사 김태석(金泰碩)의 딸이다. 김해 출신. 임진왜란 때의 첫 의병장이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이 함락되고, 다음날인 15일 동래가 적에게 넘어가자, 향우인 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유식(柳湜) 등과 함께 장정 수백 인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가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도와 중군(中軍)을 맡았다.
4월 17일 북상하던 왜군의 한 부대가 김해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자, 야음을 기해 성 밖의 적을 기습, 첫 교전에서 적 수백 명을 죽이고 김해와 부산 사이에 위치한 죽도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18일과 19일 전날의 참패를 설욕하려는 왜군이 대거 몰려오자 응원 왔던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다 먼저 달아나고, 뒤이어 부사 서예원마저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났다.
이에 분격한 그는 순수 의병만으로 영남의 곡창이며 요충지대인 이곳을 사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이끌고 들어온 장정들을 독려하여 19일 하루종일 일순도 그치지 않는 혈전을 계속하였다. 이날 밤 적은 성 주변의 보리는 물론 김해 넓은 들에 심어져 있는 보리까지 베어 성 밑에 높이 쌓고 참호를 메워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이튿날인 20일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은 와해되었다. 적이 회유책으로 투항을 권고하자 크게 꾸짖고 남은 수명의 의병을 독전해 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와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마친 장정이 수백 인을 헤아렸다.
4월 17일에서 20일까지의 4일 간에 걸친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더욱이 관군으로 버티던 부산과 동래가 하루 만에 무너진 데 반해, 비록 왜군의 한 부대였다 해도 수나 장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적과 대결하여 나흘 동안이나 버티었다는 것이 놀랍고, 특히 이후 7년 간에 걸친 싸움에서 의병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송빈의 부하인 양업손(梁業孫)이 전사자의 시체더미 속에 숨어 있다 살아 나와 당시의 참상을 전해서, 이 날의 처절한 전투가 알려졌다 이에 평정이 완전히 이루어진 1600년(선조 33) 공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1708년(숙종 34) 이순신(李舜臣)의 현손인 부사 봉상(鳳祥)이 <주지 州誌>를 보다가 그의 공적을 발견하고 감격한 나머지 충렬사(忠烈祠)를 짓도록 건의, 그를 향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에 부사 정현석(鄭顯奭)과 시인 송은성(宋殷成)의 상소로 사충단(四忠壇)이 건립되어 향사되었다. 아울러 1875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순절하던 날 장대(將臺)의 벽에 적어놓은 그의 시는 충절단성(忠節丹誠)의 대표적인 시로 꼽히고 있다.
 
3)유식(柳湜, 1552~1592)
자는 낙서(樂棲)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아버지는 현령 서종(緖宗)이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김해를 침범하자 송빈, 이대형, 김득기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을 때 동문을 수비하였다.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선조 25년(1592) 4월 20일에 죽었다. 죽었을 당시에 관직은 없었으며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4)이대형(李大亨, 1543~1592)
자는 태래(泰來), 실기(實記)가 있으며 김해출신이다. 호는 관천(觀川)이다. 본관은 월성이다. 아버지는 경유(景裕)이고, 어머니는 경주황씨 면(沔)의 딸이다. 일본군이 김해를 침범하자 김해부사인 서례원이 이를 막아낼 방책을 요청하자 그는 의병 백여 명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가 전투에 준비하였다. 이때 송빈, 김득기도 같이 행동하였으며, 그의 직책은 수성장(守城將)이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선조 25년(1592) 4월 20일에 죽었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끝내 대과에 합격하지 못하여 죽었을 당시에 관직이 없었으며, 뒤에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추증되었다.

사충단의 원래 위치는 동상동 873번지였으나 1977년 김해시의 도시계획으로 동상동 277-6번지로 이전하였다가 1995년 4월 20일 사충신의 제향일을 기해 현재의 동상동 분산(盆山) 중턱에 송담서원(松潭書院)을 준공하고 그 안에 복원하였다. 서원 안에는 비각(碑閣)을 제외하고는 모두 1995년 당시 신축된 건물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비각 안에는 사충신이 추증 받은 직함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1)표충단비
비각안에 모셔둔 표충단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2)≪國朝寶鑑≫≪四忠實記≫≪宋賓公實記≫등이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