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예림서원(禮林書院)
   http://www.nrich.go.kr/kr/mmulti/mContentV.jsp?ca_id=4&arc_id=375&arc_… [1647]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179번지
   김종직(金宗直) 박한주(朴漢柱) 신계성(申季誠)
   1567년(명종 22)
   
   3월, 9월 상정일(上丁日)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79호(1974.02.16지정) 점필재문집책판및이존록(佔畢齋文集冊板및彛尊錄)-경상남도유형문화재 175호(1979.12.29지정)
현재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영남(嶺南) 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김종직(金宗直)을 주벽(主壁)으로, 박한주(朴漢柱)을 동쪽에, 신계성(申季誠)을 서쪽에 모시고 밀양 유림(儒林)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본래는 1567년(명종 22)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덕성동(德城洞)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고 불렀는데, 1635년(인조 13)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禮林里)로 옮겼다가 1680년(숙종 6) 묘우(廟宇)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부북면 후사포리(後沙浦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강제 훼철된 바 있으나1874년(고종 11)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 5칸과 동서재(東西齋) 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光復)후에 사액(賜額) 현판을 다시 달았는데 건물은 육덕사(育德祠), 정양문(正養門), 강당, 동재, 서재, 양몽재(養蒙齋), 독서루(讀書樓)등이 있다.

1)주벽-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은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彛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박한주(朴漢柱, 1459~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돈인(敦仁)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현감으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諫)하였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평해군수·예천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 평안도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되었다.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
 
3)신계성(申季誠, 1449-1562)
신계성은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고려 때 원훈 공신(元勳功臣)인 신숭겸(申崇謙)이 그의 시조이다. 신계성은 밀양(密陽)에 우거(寓居)하며 숨어 벼슬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데에 온 힘을 바쳤다.

건물의 구조는 교육공간은 앞에, 제사공간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사당인 육덕사와 유생들의 모임 및 학문을 닦는 곳인 강당, 생활공간인 돈선재와 직방재, 그리고 전사청, 독서루 등이 남아있다. 김종직의 저서인
1)점필재문집책판및이존록(佔畢齋文集冊板및彛尊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175호(1979.12.29지정)
참고-밀양시 문화관광 http://tour.miryang.go.kr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index.js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