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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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영 규(靈 圭)
   1610년(광해군 2)
   1669년(현종 10)
   3월, 9월 상정(上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1972.02.12지정) 밀양표충사소장유품-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93호(1993.12.27지정) 사명집책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3호(1990.01.16지정)표충사제영록책판(表忠寺題詠錄冊板)-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2호(1990.01.16지정)양국대장사령(兩國大將司令)깃발-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0호(1990.01.16지정)송운대사분충서난록책판(松雲大師奮忠紓難錄冊板)-경상남도유형문화재 271호(1990.01.16지정)표충비(
표충서원(表忠書院)은 본래 표충사(表忠祠)라고 불렀는데, 임진왜란때 의승장(義僧將)으로서 구국(救國)의 대공(大功)을 세운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등 3대사(大師)를 향사(享祀)하는 곳으로서 본래는 1610년(광해군 2)에 창건하였다. 1669년(현종 10)에는 조정에서 사액하였다.
무안면 중산리 웅동(熊洞 : 현, 대법사(大法寺)자리)에 있던 것을 1839년(헌종 5) 정월에 송운대사(松雲大師)의 8세(世) 법손(法孫)인 월파당(月坡堂) 천유(天有)가 당시 영정사(靈井寺 : 현재 표충사) 주지(住持)로 있을 때 밀양부사(密陽府使) 심의복(沈宜復)과 그의 아들인 순상(巡相) 심경택(沈敬澤)의 힘을 빌리고 예조(禮曹)의 승인을 얻어, 현 위치인 단장면 구천리 영정사(靈井寺) 경내로 옮기고 편액을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고쳐 걸고, 절의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본래 서원(書院)은 유교(儒敎)의 사학(私學) 시설인데, 불교(佛敎) 사찰(寺刹) 안에 고승(高僧)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사당(祠堂)을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일반적 관례(慣例)와는 매우 이질적이라 볼 수 있겠고, 춘추(春秋) 2회에 걸쳐 매년 실시하는 향사(享祀)도 승려가 아닌 관리(官吏 : 대개 市長)가 주재하여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한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이 서원도 훼철(毁撤) 되었다가 1883년(고종 20년) 사림(士林)의 요청으로 복원(復院) 되었으며 근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1)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조선 중기의 승려·승군장(僧軍將). 완산 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 때 선조는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직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2)사명당(四溟堂, 1544~1610)
조선 중기의 승려. 승병장. 풍천 임씨(豊川任氏).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 출신.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 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 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 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① 천자의 딸을 수길에게 출가 시킬 것, ②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 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 왕자 1명을 일본에 보내어 영주하게 할 것, ⑤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 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또한, 제2차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회담(1597년 3월 18일)에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5조약의 모순성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 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하여야 한다. 둘째, 교린하여 적을 돌려보낸 뒤 백성을 안위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하여야 하며, 전쟁에 필요한 군수무기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595년에는 장편의 을미상소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민력을 기르기 위하여 목민관을 가려뽑아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일시적인 강화로 국가백년의 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국세회복에 만반의 방어책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 인물본위로 등용하여 천한 사람일지라도 나라에 쓸모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면 적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 국가기강을 쇄신하며 문란한 기풍을 뿌리뽑고 민력을 북돋아 군정(軍政) 확립의 본을 보일 것, 소(農牛)를 애호하여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 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1997년에는 사명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학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3)영규(靈圭, ?~1592)
본관 밀양(密陽). 호 기허(騎虛). 속성 박(朴). 휴정(休靜)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이어 금산(錦山)에 이르러 일본군과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다. 금산의 700의총(義塚)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 되었다. 법도(法徒)·대인(大仁) 등에 의하여 진락산(進樂山)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1)밀양표충사소장유품-경상남도유형문화재293호(1993.12.27지정)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나라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있는 절이다. 이 사당을 당시 서원처럼 보아 표충서원이라 했는데, 사찰에서 관리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祠)가 사(寺)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때 폐허가 됐던 것을 숙종 40년(1714)에 다시 세우면서,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 절의 유품 전시관에는 선조 38년(1604) 일본에 갔다 오면서 선물로 받은, 대형 목탁과 북을 포함하여 200여점의 전시물이 있는데, 대부분 사명대사가 사용하던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2)사명집책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3호(1990.01.16지정)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승장(義僧將)으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사명(四溟)은 그의 별호인데, 대사께서 세상을 떠나자 혜구(惠球)를 비롯한 그의 문인들이 대사의 견문을 모아 편집하여 이 문집에 실었다.
권 1에는 사(辭), 권 2에는 오언율시(五言律時), 권 3에는 칠언율시(七言律詩), 권 4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 권 5에는 선게(禪偈), 권 6에는 잡문(雜文)과 시(詩)들이 실려 있고 뒤에 부록처럼 비문(碑文)과 행적(行蹟)이 붙어 있다.
 
3)표충사제영록책판(表忠寺題詠錄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2호(1990.01.16지정)
이 책판(冊板)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사당(祠堂)인 표충사(表忠祠)에 대한 글을 모은 것인데 김상집(金尙集)이 찬(撰)한 것이다. 간행연대는 알 수 없으나 표충사(表忠祠)의 내력을 알고 사명대사의 활동과 전공(戰功)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된다.
모두 7권이었는데, 이를 간행하기 위해서 당시 대문호였던 교산 허균(蛟山 許筠)에게서 서문(序文)을 받았고 발문(跋文)은 승려 뇌묵당(雷默堂)이 썼다. 그 때가 광해군 4년(1612년)이였다. 그 후 책판이 썩고 흩어져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임진년(壬辰年) 가을에 승(僧) 성일(性一)이 사명대사의 비문과 행적(行蹟)을 부록으로 더하여 중간(重刊)하였다.
 
4)양국대장사령(兩國大將司令)깃발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70호(1990.01.16지정)
표충사 유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는 이 사령(司令) 깃발은 사명대사(四溟大師)가 강화사(講和使 : 싸우던 나라끼리 평화를 논의하기 위해서 정해진 회담장소에 파견되는 국가대표)로 일본으로 떠날 때 선조 임금이 하사(下賜)한 사령기(司令旗)이다. 당초에는 부속장식과 같이 깃대에 매달도록 되었을 것이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훼손이 심한 상태이므로 보존상의 문제점을 감안하여 지금은 약품처리하여 큰 액자(額子)로 표구하여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각 영(營)의 대장(大將), 유수(留守), 순찰사(巡察使), 통제사(統制使) 등이 휘하 군대를 지휘하는데 쓰던 사령기는 기의 바탕이 각 방위에 따라 황색(黃色), 청색(靑色), 백색(白色) 등으로 다르고 각 진영(陣營)의 이름을 붙여서 지휘관의 신분을 표시하였다. 이 기의 아래 끝에는 너비 세치에 길이 두자 반의 옷고름 비슷한 오색비단으로 미대(尾帶)를 달고 영두(瓔頭), 주락(珠珞) 등의 장식도 달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깃발의 내용이
참고-밀양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miryang.go.kr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