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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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혜산서원(惠山書院)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607
   손홍량(孫洪亮) 손조서(孫肇瑞) 손처눌(孫處訥) 손 린(孫 遴) 손우남(孫宇男)
   1753년(영조 29)
   
   2월 중정(中丁)
   경상남도유형문화제 제297호(1994.07.04지정)-격재선생문집책판(格齋先生文集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98호(1994.07.04지정)
산외면 다죽리 죽서(竹西)마을에 세거(世居)하는 일직(一直) 손씨(孫氏)의 5현(賢)을 받드는 서원으로 본래는 1753년(영조 29)에 창건한 손조서(孫肇瑞)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자리이다. 손조서는 조선 초기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와 탁절(卓節)로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한 학자인데 후일에 사림(士林)들의 추앙을 받아 이곳에 서원을 세웠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된 후 그 집을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로 편액(扁額) 하였다.
1971년에 서원의 경역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 봉안되었던 일직 손씨 명현 다섯 분의 서원(書院)인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의 안동 타양서원(陀陽書院),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의 밀양 서산서원(西山書院),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의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 문탄 손린(聞灘 孫燐)의 대구 봉산서원(鳳山書院), 윤암 손우남(綸菴 孫宇男)의 영천 입암서원(立巖書院)등을 후손들의 세거지인 이곳으로 옮겨 복설(復設)하고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중건한 것이다.

1)주벽-손홍량(孫洪亮, 1287-137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일직(一直). 본래의 성은 순씨(荀氏)였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그것을 피해 5대조 응(凝) 때 손씨로 고쳤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충혜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49년(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51년 치사(致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왕이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할 때 중도에서 평복으로 왕을 맞아 치하를 받았다.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서 왕으로부터 궤장(几杖)과 자신의 초상화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2)손조서(孫肇瑞, 14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인보(引甫), 호는 면재(勉齋)·격재(格齋). 득수(得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유(永裕)이고,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관(寬)이며, 어머니는 김흡(金翕)의 딸이다.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의 제자를 두었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에 보직되었으며,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가 되었다.
1451년(문종 1)에 병조정랑을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격재집≫이 있다.
 
3)손처눌(孫處訥, 1553-163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 할아버지는 현감 치운(致雲)이다. 성주(星州) 출신.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과 투쟁하려다가 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난 후 향교의 재건에 앞장서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의 이황(李滉) 배척에 대항하여 척사부정(斥邪扶正 :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르고 옳은 것을 세움)의 글을 지어 도내사림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4)손린(孫遴,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 순무(荀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경(世經)이고, 아버지는 덕운(德雲)이다. 김우옹(金宇顒)과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0년(선조 33) 향시에 합격한 뒤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론(文廟從祀論)이 일어나 정인홍(鄭仁弘)이 이를 논척하자, 종질인 처눌(處訥)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만들어 이를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히었다. 1615년 안동교수(安東敎授)가 되고, 1618년 예문관봉교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단성현감을 지냈는데 자못 치적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정경세(鄭經世)에 의하여 추천되어 의병장이 되었고, 난후 향리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았다. 정경세가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고 장현광(張顯光)·김상용(金尙容)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강직한 성품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대구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탄집≫이 있다.
 
5)손우남(孫宇男, 1564~1623)
임진왜란 때 영천에서 여헌(旅軒 張顯光)과 향도 사림을 선도한 학자이다.

서원의 규모는 1,300여 평의 대지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전사당(典祀堂),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등 13동의 건물이 경역에 자리 잡고 있다.

1)격재선생문집책판(格齋先生文集冊板)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98호(1994.07.04지정)
조선 전기의 학자인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의 문집을 새긴 목판이다. 손조서는 집현전학자, 병조정랑, 봉산군수를 역임하였던 학자로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행위에 분개하여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와 정절로서 두문분출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하였다. 대구 청호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