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계서원(龜溪書院)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산43
   이 정(李 楨) 김덕함(金德諴)
   1606년(선조 39)
   1611년(광해군 3)
   3월 12일, 9월 16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1983.07.20지정)
이 서원은 1606년(선조 39)에 세웠으며, 1611년(광해군 3) 사당인 구산사를 세웠다. 1676년(숙종 2)에 ‘구계’라는 현판을 나라에서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23년(경종 3)에는 김덕함(金德諴)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931년에 다시 세웠다.

1)주벽-이정(李楨, 1512~15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맹주(孟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번(以蕃)이고,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담(湛)이며, 어머니는 진주 정씨(晉州鄭氏)이다.
1536년(중종 31)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 봉양을 위해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1552년(명종 7) 사성, 이듬 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 때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1555년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군기를 엄정히 해 구원하러 가자 그 위엄에 눌려 왜구들이 도망하였다. 1559년 우부승지·형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대사간·호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옛 신라의 열왕묘(列王墓)를 보수하고, 서악정사(西嶽精舍)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다.
1563년 중앙의 요직에 잠시 있은 뒤 다시 전라도 순천부사로 나가 갑자사화 때 사사된 김굉필(金宏弼)을 위해 경현당(景賢堂)을 건립, 그를 제사하게 하였다. 1568년(선조 1)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동쪽에는 거경재(居敬齋), 서쪽에는 명의재(明義齋)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어릴 때 송인수(宋麟壽)로부터 배우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성리학에 밝았다 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구암문집≫을 비롯해 ≪성리유편 性理遺編≫·≪경현록 景賢錄≫·≪논상례 論喪禮≫·≪한훤보록 寒暄譜錄≫·≪열성어제 列聖御製≫ 등이 있다.
 
2)김덕함(金德諴, 1562~16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형(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장수(長琇)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홍(洪)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었으나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7년(선조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다시 진사가 되었으며, 158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이항복(李恒福)의 후원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 해 행재소인 정주까지 왕을 호종, 그 공으로 공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임시로 군공청(軍功廳)을 세워 전쟁의 공과를 실시할 때 비변사낭청을 제수받았다. 이 밖에 예조와 공조의 좌랑과 비변사낭청·호조정랑·직강·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청풍·단천·성천·장단·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597년 일본의 재침으로 분조(分曹)가 세워지자 호조정랑으로서 분호조정랑(分戶曹正郞)을 겸임해 군량 조달에 힘썼다.
광해군 때 군기시정에 이르렀으나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으며, 명천·온성·사천 등지에 이배되었다.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집의와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대사헌에 올랐다. 이 때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성옹유고≫가 전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서원의 외부 가파른 계단을 올라 풍영루(風咏樓)의 외문을 들어서면 경내에는 유생들의 글방 및 회의장이었던 서재(講堂, 不欺堂)와 동재(居敬, 明義齋)가 서로 마주하여 배치되어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 내삼문인 중기문(重起門)을 들어서면 높은 장대석 위에 위패를 모신 묘우(廟宇)가 배치되었다.
묘우 아래 좌측에는 허목이 찬서한 구산사비(龜山祠碑)와 우측에는 김덕함(金德諴) 및 최관(崔瓘)의 기적비를 세워놓았다. 전체 구조는 목조와가 5동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5칸의 강당,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양식인 3칸의 묘우(廟宇) 등이 있다. 중기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풍영루는 2층 고진각지붕 양식이다. 건물수량은 5동, 면적은 3,967㎡이다.


참고-사천시사, 2003.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