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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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목계서원(牧溪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방목리 239
   이 조(李 晁) 김 담(金 湛)
   1778년(정조 2)
   
   3월 7일
   
1778년(정조 2) 창건되었으며,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1983년에 중수되었다. 현재 편액은 목계정사(牧溪精舍)이고 1동이다. 재실만 있다.
조선 숙종 조에 사림이 김담(金湛)과 이조(李晁)를 두능서원(杜陵書院)에서 봉향하다가 서원이 훼철되자 1778년(정조 2)에 유림들이 목계서원을 지어 다시 봉향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된 것을 1883년(고종 20)에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83년에 완전히 복원되었다. 이 서원을 ‘목계정사(牧溪精舍)’로도 부르는 것은 훼철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1)주벽-이조(李晁, 1530~158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경승(景升), 호는 동곡(桐谷). 아버지는 계유(繼裕)이며, 어머니는 사천이씨(泗川李氏)로 통사랑 수화(秀華)의 딸이다. 10여세에 ≪소학≫과 사서(四書)를 독파하였고 조식(曺植)을 찾아가 사숙하였다.
이 때 최효원(崔孝元)과 하호원 (河浩元) 등과 사귀게 되어 그들의 추종을 받았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진주와 경주의 훈도(訓導)로 있다가 1574년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에 취임하였으나 조의(朝議)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여 귀향하였다.
그 뒤 봉상시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원당정사(元堂精舍)를 짓는 등 학문에 정진하였다. 1577년 해미현감, 1579년 형조좌랑, 1580년 다시 형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원당정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사림들이 그를 애도하여 회장(會葬)하였다.
그 뒤 숙종 때 이르러 단성(丹城)의 두릉서원 (杜陵書院)에 배향되고, 헌종 때에 성주(星州)의 안산서원(安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곡실기>가 있다.
 
산청선비<동곡 이조> 청렴함 맑은 얼음조각 같아 선비의 고장 산청에 예부터 ''구현(九賢)''이라 불리는 어진 선비 9명이 있었다. 대부분 남명선생의 제자들인 이들은, 원당(元堂)에서 살면서 나라를 걱정하며 학문을 탐구하였다. ''구현(九賢)''중 한 사람인 동곡(桐谷) 이조(李晁)는 1530년 산청 원당에서 부사직(副司直) 계유(繼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경승(景升)이다. 본관은 성주(星州)로 할아버지때 용인(龍仁)에서 산청으로 내려와 대대로 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친에게 부지런히 글을 배워, 20세가 되기 전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등에 능통하게 되었다. 21세때 진양 강씨(晉陽姜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30세때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극진한 예로 3년상을 마쳤다. 부친상을 마치고 곧바로 산천재(山天齋)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으니, 32세때이다.
남명의 문하에 들어가 ''경의(敬義)''를 수양의 근본으로 삼아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며 같은 문하생들인 덕계 오건, 수우당 최영경, 동강 김우옹, 각재 하항, 조계 유종지 등과 서로 교유하며 학문에 힘썼다. 특히 덕계 오건과의 친분은 남달랐다. 덕계가 세상을 떠나자 동곡은 제문을 지어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해 동안 형제와 같이 우애 돈독했네"라고 하여 마치 이끌어 주던 형이 세상을 떠난 것같이 슬퍼하였다. 38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진주훈도(晉州訓導)로 나갔다.
진주훈도는 진주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으로,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직책이었다. 진주훈도로 나간 동곡은 해이해진 학풍을 바로잡고 규율을 엄히 세워 향교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동곡의 이러한 태도를 남명선생이 듣고, 진주훈도로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42세때는 경주훈도로 나가 진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제들을 엄히 가르쳤다. 43세때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제문을 지어 애도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이듬해 5월 성균관 학정(學正)을 제수받았다. 6월에 호송관에 임명되어 일본 사신을 동래까지 호송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 사신이 후추 1자루를 선물로 주려 하자, 동곡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신하된 자가 사사로운 선물은 받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사신은 이를 듣고 그 청렴함에 놀라워하면서 "선생의 청렴함은 한 조각 맑은 얼음 같아 이 더운 6월에도 서늘하게 느껴집니다"라고 하였다. 동곡의 청렴함을 잘 말해 주는 일화라 하겠다.
45세때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공조정랑 등을 두루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곡이 벼슬에 있을 때, 청렴함 때문에 조정에선 시기와 질투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하여 동곡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탐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 녹봉(봉급)을 봄 여름 가을 겨울 4차례에 나눠주었는데, 동곡은 혹 아파서 공무를 보지 못한 때가 있었으면 녹봉을 계산하여 그만큼은 돌려보냈다. 이러다 보니 같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동곡을 보고 자기만 깨끗한 척한다고 하면서 시기와 질투를 하였다. 이런 동곡은 탐관오리들과는 한 조정에 있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벼슬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낙향을 한 것이다. 7월에 형과 같이 따르던 덕계 오건이 세상을 떠나자 가서 조문하였다.
47세때 조정에서 봉상시 주부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원당정사(元堂精舍)를 지어 만년을 보내고자 하였다. 즉 이로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 수양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이때 동곡이 말하기를 " 선비가 벼슬에 나가고 나가지 않는 것은 시대가 태평한가 어지러운 가에 달려 있으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벼슬에 뜻을 버리게 된 것이다.
동곡이 살던 집 뜰에는 푸른 오동나무 한 그루 있었다. 오동나무는 예로부터 봉황이 깃들이는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왔다. 이 오동나무로 인하여 호를 동곡(桐谷)으로 지은 것이다. 또한 뜰 앞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한 수의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정결한 뜰 앞 나무/ 곧게 서 홀로 푸르름 지녔다가 점점 가지와 잎 무성하니/봉황이 깃들어 머물 수 있겠구나 동곡 자신의 바람을 읊은 시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한 마음만을 기르다가, 낙향하여 학문을 연마하여 선현들의 덕행을 본받는다면, 가지와 잎 무성한 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들 듯이 동곡 자신의 덕행 또한 온 천하에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을 드러낸 시라고 볼 수 있다.
이해 8월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50세때 조정에서 형조좌랑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동곡은 세상의 도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조정에 나가 벼슬하기보다는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학문에 침잠하고자 하여 벼슬을 사양한 것이다.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에 동곡에 대해 기록하기를, "어릴 때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온 마음을 다하여 일상생활의 일로 부터 하늘의 덕과 왕도에 이르기까지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더욱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동곡의 학문 태도의 일 단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1세때 조정에서 다시 예조좌랑의 벼슬로 불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4월 부인 강씨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12월 23일 동곡도 원당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1세이다.
1588년에 산청의 유림들이 동곡의 학문과 정신을 추모하고자 두릉사(杜陵祠)를 건립하여 산청의 제현(諸賢)들과 아울러 향사를 지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두릉사는 두릉서원(杜陵書院) 목계서원(牧溪書院) 용운재(龍雲齋) 등으로 변천하여, 현재는 단성면 방목리(放牧里)의 목계정사(牧溪精舍)에서 동곡을 모시고 있다.(1997.1.17.경남일보)"
 
 
2)김담(金湛, 1500~156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구원(久源). 호는 급고재(汲古齋). 상주 법물리(尙州法勿里)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한림(翰林) 수돈(守敦)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뛰어나서 문장에 능하였고, 사서육경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명성이 널리 퍼졌다.
성인이 되어서는 학업에 뜻을 굳히고 삼가(三嘉)의 몽계사(夢鷄寺)에 들어가 30년 동안 만여 권의 책을 독파했다. 부모의 권유로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정시(庭試)를 응시하지 않았으며, 뒤에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친시(親試)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진사시(進士試)를 거치지 않은 이유로 실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식(曺植)·강익(姜翼)·임훈(林薰) 등의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뒤에 영상 노수신(盧守愼)의 천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급고재라는 정사를 지어 문중의 자제들과 이웃의 젊은이들을 교육하였다.
항상 ≪춘추 春秋≫는 의리의 대종(大宗)이요 ≪주역 周易≫은 천지의 변화를 다한 것이라고 말하고 마음이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며 내가 하늘에서 얻은 것이나 궁달(窮達)을 가지고 천분(天分)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천인성명(天人性命)에 대해 주장했다.
<순욱론 荀彧論>과 <허형론 許衡論>이 중국에 들어가자 중국의 학자들도 그 논지의 정연함을 감탄하면서 동방에는 아직 이러한 글이 없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급고재문집≫ 6권이 있다. 두릉서원(杜陵書院)에 제향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고 기둥의 형태는 외진주가 원기둥이고 내진주는 네모난 기둥이다. 현재 편액은 목계정사(牧溪精舍) 1동이고, 재실만 있다. 두 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오른편에 2개, 왼편에 1개가 있다. 양 측면의 방 출입구는 분합문으로 구성하였다.

1)≪급고재문집(汲古齋文集)≫
조선 중기의 학자 김담의 시문집이다. 6권 1책으로 목활자본이다. 이 책은 철종 6년(1855)에 9대손 인섭(麟燮)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1897년에 11세손 진호(鎭祜)가 중간하였다. 인섭의 서문과 권계형(權繼亨), 진호의 발문이 있다.

참고-산청군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