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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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송담서원(松潭書院)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823-3
   백수회(白受繪)
   1714년(숙종 40)
   
   3월 중정(中丁)
   
조선 인조(仁祖) 때 사람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추증(追贈)된 백수회(白受繪)의 충의를 기리고자 군민과 백씨 문중에서 1714년(숙종 40)에 서원을 세우고 백수회의 호인 송담으로 이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시에 철폐되면서 당시의 건물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아 있었는데 1985년 가을에 사우를 중건하고 춘삼월 중정에 복향 하였다.

1)주벽-백수회(白受繪, 1574~164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경상남도 양산 출생. 부여 백씨(扶餘白氏)지만, 그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고, 또한 병화(兵火)로 그의 보첩(譜牒)을 잃었기 때문에 가계(家系)가 분명하지 못하며, 언제 양산에 옮겨 정착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일본에서 풀려나 돌아와 증조대(曾祖代)로부터 중시조(中始祖)를 잡아 새로 가첩(家牒)을 이룬 것 같다.
10대 초반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장했으나 학행(學行)에 힘썼고, 어렸을 때부터 지기(志氣)가 남들에 비해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68년에 걸친 생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내 정세의 불안으로 평탄하지 못하였다.
19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발발해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거기서 9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지만 고국에 대한 지절(志節)을 굽히지 않아 오히려 왜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포로 생활의 고독한 심사를 시편이나 가사로 짓다가 27세 되던 해 석방되어 환국하였다. 당시 세인들은 그의 지조를 기려 그가 머물던 가자방리를 가리켜 백의사리(白義士里)라고도 했다.
그 뒤 약 14년 동안은 외부와 단절하고 아무런 교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0세 되던 해 조정에서는 광해군의 폐모 사건으로 의론이 분분할 때 그에 분연히 반대하는 등,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 번 상소해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점차 명사들과 교유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상소를 한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후, 후학의 교육에 힘썼으며 둔세절교(遁世絶交)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현종이 호조참의에 추증하고, 옛 집에 충렬사(忠烈祠)를 지었으며, 숙종이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왜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지은 5편의 한시와 가사를 남기고 있다. 가사 4수는 <도대마도가 到對馬島歌>·<재일본장가 在日本長歌>·<단가 短歌>·<화경도인안인수가 和京都人安仁壽歌>로서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박인로(朴仁老)의 가사들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가사 문학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었다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적지에서 불굴의 우국충정을 노래했다는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2칸의 마루와 양쪽에 방이 배치되어 있다. 묘우인 충렬사는 정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참고-양산시지, 2004.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