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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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기강서원(岐江書院)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617
   이운룡(李雲龍)
   
   
   4월, 9월 中丁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05호(1995. 06. 19. 지정)-이운룡 선무공신 교서외 관계문서 보물 제1212호(1994. 10. 17. 지정) 경상남도 기념물 제274호(2010.06.17.지정)-의령군 오천리 이운룡 장군 묘역
기강서원(岐江書院)은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식성군이운용(息城君 李雲龍) 장군의 혼(魂)과 공훈(功勳)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장군의 묘소(墓所)는 원래 고향인 경북 청도군 법귀산에 안장되었으나 인조 8년(1630년) 사자(祠子)인 엄(儼:평택현감)이 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로 이장하였다.
이에 경남지역 유림에서는 장군의 묘소 앞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합의하고 정재(淨財)를 모아 1950년 4월 먼저 통영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충열사 앞에 식성군의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이때 비문(碑文)은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지으시고 축문(祝文)은 노산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쓰셨다. 그러나 서원 건립은 경인병란(6.25전쟁)으로 지연되었다가 1959년 방후손(傍後孫) 이기환(李基煥)이 유림(儒林) 과 상의하여 식성군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기강서원건립에 착수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윤보선대통령과 백낙준 참의원의장 장면 국무총리 곽상훈 민의원의장등 삼부(三府)요인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의 거국적인 의연금(義捐金)이 답지(遝至) 하였고 본도(경남)지사 이중헌과 교육감 이윤근씨 등의 주도하에 원활한 재정 지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해군통제부(海軍統制府)와 제39사단에서는 군정(軍丁)을 지원하여 1965년 사우(祠宇) 3간, 내외강당 3간, 창고 3간, 부속실 2간, 정문 5간 등 20여간의 서원을 준공했다. 그리고 보존회에서는 1967년 3월 20일 총회를 열어 충양사위패봉안식(忠讓祠位牌奉安式)을 올렸다. 이때 경남지역을 유세중이던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국회의장, 함명수 해군참모총장, 김상길 해군통제부사령관, 김영관 해군함대 사령관 등이 서원에 참배하고 기념식수를 했다.

1)이운룡(李雲龍 1562~1610)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의 본관은 재령(載寧)이니, 식성(息城)은 재령(載寧)의 고호(古號)이다. 그는 명종(明宗) 11년(1562년)에 청도(淸道)에서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지낸 이몽상(李夢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경사(經史)에도 통달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7년 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4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니 선조(宣祖) 18년(1585년)의 일이다. 2년 뒤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가 선조(宣祖) 22년(1589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옥포(玉浦)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었다. 다시 3년이 지난 선조(宣祖)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해 5월 7일, 왜선(倭船) 50여척이 옥포(玉浦)에 나타났으므로 그는 우리 수군(水軍)을 이끌고 나가 이들을 모두 격퇴시켰으니, 이 싸움이 바로 옥포해전(玉浦海戰)이다. 이어 그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전라수군(全羅水軍)과 협력하여 안골포(安骨浦 ), 웅천(熊川) 등지의 해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에도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듬 해 그는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전임되었다가 선조(宣祖) 29년(1596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가 되어 전란으로 흩어진 전비(戰備)를 다시 가다듬었다. 선조(宣祖)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영천(永川)의 창암(倉岩)벌에서 적을 막아 왜군(倭軍)의 동진(東進)을 저지하였으며, 명(明)나라 원군과 같이 왜장(倭將) 가또오(加藤淸正)가 농성하는 울산성(蔚山城)을 공략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는 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몹시 아끼던 부장(部將)이었다. 그 증좌로는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식성군(息城君)의 이름이 번번히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전란(戰亂)이 끝나고 선조(宣祖) 37년(1604년)에 그는 선무공신(宣武功臣)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 겸 화기제조(火器提調)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에 올랐으며 그해 9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어 선조(宣祖) 40년(1607년)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 2년 뒤엔 충청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를 역임한 다음 광해군(光海君) 2년(1610년) 49세를 일기로 파란 많던 생애를 닫았다. 나라에서는 그의 생전의 업적을 기려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였다. 그는 사후 그의 향리인 청도에 안장되었으나 아들인 평택현감(平澤縣監) 이엄(李儼)에 의해 지금의 묘소(墓所)인 의령군 지정면(芝正面) 오천리(梧川里)로 이장(移葬)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재임 중에 계본등록(啓本謄錄)과 거영일기(居營日記)는 현재 청도(淸道)의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소장되어 있으니 이는 임란전사(壬亂戰史)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기강서원(岐江書院)에는 장군의 위패(位牌)가 봉안되어 있으며 춘추(春秋)로 2번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다.

서원은 雄山公의 墓所를 배경으로 앞쪽 정암(鼎巖)에서 흐르는 물과 洛東江水가 合하는 곳 岐江 이곳에 남향으로 충양사(忠讓祠), 서원(書院), 솟을삼문이 雄谷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ㅇ 충양사 : 정면 3칸, 측면 2칸, 기단-강회다짐, 주초-화강석 다듬질,
기단-사각주, 가구-3량, 처마-겹처마, 지붕-한식기와, 형태-합각, 단청-유
ㅇ 서원 : 정면 4칸, 측면 2칸, 기단-강회다짐, 주초-화강석, 기둥-원주,
지붕-한식기와, 형태-팔작지붕
ㅇ 솟을삼문 :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집
ㅇ 관리사 : 정면 3칸, 측면 2칸, 기단-한식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