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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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의양서원(宜陽書院)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판곡
   남효온(南孝溫) 남진(南振) 남용익(南龍翼) 남창희(南昌熙)
   1861년(철종 12)
   
   불향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등 4位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861년(철종 12)에 창건되었지만 곧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재건되었다.

1)주벽-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恮)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남진(南振)
자는 성유(盛由), 호는 추계(秋溪) 이다. 음관으로 선략장군이다. 재종숙 남효온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학과 청검으로 이름났다. 갑자사화때 삼가 두심동으로 낙향하여 세상을 마쳤다.
 
3)남용익(南龍翼, 1628~169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복시(復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鎭)이고, 아버지는 부사 득붕(得朋)이며, 어머니는 신복일(申復一)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과 삼사를 거쳐, 병조좌랑·홍문관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잠시 경사도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삼사로 돌아왔다.
1655년(효종 6)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중지되고, 여러 가지 협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다.
이듬해 돌아와 호당(湖堂 : 독서당)에 뽑혀 들어갔고 문신중시에 장원,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형조·예조참의, 승지를 역임하고 양주목사로 나갔다. 현종 때는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을 빼고는 전 참판을 지냈으며, 잠시 외직으로 경상·경기감사로 나갔다가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숙종 6)부터 좌참찬·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689년 소의 장씨(昭儀張氏)가 왕자를 낳아 숙종이 그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여기에 극언으로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3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효종·현종·숙종 3대에 걸쳐 청화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문명을 날렸으나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늘 근신하고 근면하였다.
저서로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명인 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 箕雅≫ 및 ≪부상록 扶桑錄≫, 그리고 자신의 시문집인 ≪호곡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4)남창희(南昌熙, 1875~1945)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명중(明重)이고 호는 이천(夷川)이다. 농와 붕익(聾窩 鵬翼)의 후손으로 정재규에게 수학하여 학문의 근본을 깨우쳤으며 문장과 도학으로 널리 알려져 송재낙과는 중용을, 최원중과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정면규와는 하학상달(下學上達) 등을 심도있게 토론하였다. 숙부 남정우와 문호를 크게 열어 많은 원근 학자들과 상교(相交)하면서 문하생에 전하여 제자들이 많았다. 문집 19권 10책이 전한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