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전조생(田祖生, 1318~1355)
고려 후기의 학자.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계경(季耕). 호는 경은(耕隱).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희경(希慶)이며, 어머니는 웅신서씨(熊神徐氏)로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성윤(成允)의 딸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에 급제하였고,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왕이 그를 불러 두 왕자를 한(漢)나라 곽광(霍光)과 제갈량(諸葛亮)같이 보필하여줄 것을 부탁하였다. 1346년(충목왕 복위 2) 이제현(李齊賢)·이곡(李穀) 등과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찬정(撰定)하였고, 우탁(禹倬)을 따라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講明)하였다.
1349년(충정왕 1) 찬성첨의부사(贊成僉議府事)에 제수되었고, 1351년 다시 찬성첨의부사에 올랐을 때 왕이 강화에서 손위(遜位)하자, 이강(李岡)·박사신(朴思愼)·한수(韓修) 등과 호종(扈從)하였다가 그길로 운둔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계자시 誡子詩>와 <경학문 警學文>을 지어 후진을 계도하였다. 태암서원(泰巖書院)에 별향(別享)되었고, 구산서원(龜山書院)·소계서원(蘇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2)전자수(田子壽)
호는 회정(晦亭)이며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 문원공(文元公) 경은(耕隱) 선생의 손으로, 벼슬은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 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었다. 고려의 국운이 날로 쇠퇴됨을 한탄하여 말하기를 “서리바람 차가우니 얼음 얼 날 멀지 않고, 일찌감치 그만두자 늦어지면 후회하리”라 하였고, 사간(司諫)직으로 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가 되어 순시 중 평해에 와서 산수가 뛰어나게 아름다움을 빙자하여 벼슬을 돌려주고 물러나 숨어서 양진재(養眞齋)를 짓고, 항상 청우(靑牛)를 타고 소나무와 흰모래 사이를 다니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으니 “출세할 때 하고, 숨을 때 숨고, 말할 때 말하고, 말안할 때 안하는” 옛 사람처럼 유학자의 처신과 같았다. 또한 공이 지은 제월송정은 “드러나고 감춰짐이 달과 같고, 몸가짐과 의리는 솔과 같노라. 정자는 두 정학을 겸했으니 이것이 중용의 도리 일리라”하였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과 의리로 사귐이 있어
술을 주고받을 때 시가 있었고 편지에 오고 간 글이 김구용(金九容) 문집에 실려있다. 평해군수 권공(權公)이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훌륭한 사람을 모두 찾아 벼슬을 주는 것인데 벼슬을 버리니 세상이야 알던 말던 뛰어나고 어젓한 청사(淸士)라” 하였다. 동강 김영한(東江 金寗漢)이 묘비문에 “천추의 빛이 되니 아! 회정(晦亭)이라 하다. 태암서원(泰巖書院)과 본 고을 경문사(景文祠)에 봉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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